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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나 Aug 04. 2023

억겁같은 찰나

[이번엔 4기다!] - 2.

"얼른 큰 병원에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앞에 앉아 계신 의사 선생님의, 무심한 듯 툭 던진 저 한 마디.


뻐끔 입을 벌렸지만 아무 소리도 안 나오던 나와,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만 보시던 의사 선생님,

그런 두 사람 옆에 가만히 서 계시던 간호사 선생님.

굉장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여기 골반뼈에 이거 보이시죠? 이 부분이 문제니까 얼른 큰 병원 가세요."


의사 선생님이 가리키고 있는 부분에 너무도 선명히 보이는 무언가.

도대체 쟤는 언제부터 내 몸 속에서, 그것도 하필이면 뼈 속에서 저러고 자라고 있었을까.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 직면하면 자신도 몰랐던 초인적인 능력이 나온다고 하더니, 내가 딱 그랬다.

그냥 병원 말고 국내 4대 종합 병원 중에서 진료를 봐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시크한 듯 친절한 한 마디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와중에도, 그 병원들 중에서 빠르게 검사 날짜를 잡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이 머릿속에 와다다다 세워지고 있었다.

        

1. 빠르게 진료를 보기 위해서는 무조건 스피드가 생명! 무조건 빠르게 전화하여 진료일자를 선점(??) 하여야 하는데,

2. 아무래도 진료 이력이 있는 곳이 예약을 더 빨리 잡아줄 것 같으니 1차 목표는 무조건 서울대병원이어야 하고,

3. 지금 이 순간에도 진료 예약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을 테니 집에 걸어가면서 바로 연락을 할 건데,

4. 절대로 오늘을 기준으로 한 달을 넘기면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빠른 날짜를 잡아야만 한다!


보통 이런 상황일 때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 울든, 영혼 다 빠져나간 눈빛으로 목적 없는 터벅 걸음을 걷든 하던데 이렇게 숨도 겨우 쉴 수 있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목표를 이루기 위한 최적의 코스를 찾아 구조도를 그리는 내가 나도 참 어이가 없다.

이럴 때 보면 역시 확신의 J.

하긴.

생각해 보면 2009년 그때도 암이란 걸 확정받자마자 제일 먼저 했던 짓이 보험사 전화해서 암 진단금 어떻게 수령하면 되는지 알아보는 것이었으니.

사람이 참 일관성 있네 그려. 어휴.




병원 문 밖을 나서자마자 바로 서울대병원으로 전화부터 했다.


약간의 기다림 끝에 전화 연결은 됐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 정리를 전혀 하지 않고 전화를 했다는 것을 전화 연결이 되고 난 후에야 알아챘다.

어떤 일 때문에 전화했냐는 상담사의 질문에 또 잠시 멍해진 나.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하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원래의 나였다면 사회적인 이미지를 위하여(?) 해야 할 말을 정리하여 정돈된 단어와 문장을 구사했겠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도 아니거니와 따진다 한들 제대로 정리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닌 듯하여 그냥 생각나는 그대로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제 뼈 속에 안 좋은 게 있다고 하네요."


아무리 엄청난 상황 앞에 놓인 나지만... 이렇게 몸 쪽 꽉 찬 돌직구로 던질 줄이야. 절레절레.

병원의 상담사면 대충 나 같은 사람들의 전화를 많이 받았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내가 워낙 예상치도 못한 공격을 해서인지 "아..." 하는 당황함이 잔뜩 섞인 탄식을 내뱉더니 이내 정신줄을 부여잡으시고는 나의 현 상황을 면밀히 탐색하기 시작했다.


길바닥에서, 그것도 전화기 붙들고 울면 무조건 사연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혀 주변의 힐끔거림을 받게 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일종의 생활의 상식 같은 것. 내가 비록 지금 처한 상황만 놓고 봐서는 책을 써도 될 만한 소재거리를 지닌 사람이 되었음에는 분명하나, 길바닥 눈물 주르륵은 진짜 멋진 외모를 지닌 분들이 해도 멋질까 말까 한 것이라 나같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은 아무리 잘 봐줘도 전혀 멋질 수 없다는 객관적인 자기 분석 정도는 기본값으로 갖추고 있는 배운 사람이란 말이지. 하여 지금 이 순간 내가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것은 '눈물샘 안 터지게 하기'란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수화기 너머에는 나와 일면식도 없는 생판 남. 내 아무리 눈물이 많고 이 상황이 눈물 쏟기 딱 좋은 상황이어도 '눈물샘 지키기'는 최소한의 나의 품격과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최후의 보루같은 것이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 더욱 빛을 발해 주는 내 이성 아주 칭찬해.

  

내가 가야 할 것으로 예상되는 진료과에 두 분의 교수님이 계시는데 한 분은 많이 유명하신 분이라 11월 이후 예약이 가능하고 다른 한 분은 9월 둘째 주에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얘네들과의 싸움은 무조건 "시간"이란 걸 경험적으로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던 터라 9월 진료가 가능한 교수님으로 예약 요청을 하였고, 그렇게 2022년 9월 14일 진료 예약을 확정 지었다.




가장 시급했던 진료 예약을 하고 나니 그야말로 온몸에서 모든 게 순식간에 다 빠져나가는 기분.

늦여름 한낮의 햇볕은 8차선 대로 위를 달리는 무수한 자동차들과 함께 자글자글 공기를 끓여대고 있었지만 도저히 빠르게 걸을 수 없었던 난, 가족 중 유일하게 나의 병원 진료 일정을 알고 있었던 동생에게 "나 좀 큰일이 난 것 같다"라는 톡 하나를 힘겹게 던지고는 아까는 목표를 이루느라 바빠서 할 수 없었던 '영혼 빠져나간 자의 걸음'을 터벅터벅 던지며 멍하게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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