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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나 Sep 08. 2023

정원, 관광객 그리고 모기

[이번엔 4기다!] - 6.

서울대학교암병원은 4층에 입원 병동이 있다. 병원의 특성상 이 건물에서 병원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죄다 나와 같은 암환자들이다. (비록 병의 종류와 정도는 다를지라도)

암병원 건물은 총 4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3층까지는 에스컬레이터가 연결되어 있지만 입원 병동인 4층에 오려면 반드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이 병동을 이용하는 환자의 특성 및 병동의 침상 수를 고려했을 때 굳이 사람들이 상시로 드나들 수 있는 이동 수단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어차피 엘리베이터를 타면 한 번에 올라올 수 있고, 내려갈 때는 입원 병동 층이 최상층이다 보니 엘리베이터를 못 탈 일은 없기에 치료층과 입원층이 느슨하게 잘 분리된 것 같아서 오히려 입원 환자들에게는 더 좋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 4층에는 "행복정원"이라 불리는 작은 정원이 꾸며져 있다. 으레 일정 정도 이상의 규모를 갖춘 건물들에는 필수적으로 꾸려야 하는 조경일테지만 창경궁을 마주한 상태로 약간 내려보며 바라볼 수 있는 전경은 꽤나 멋지다. 게다가 주변에 높은 건물도 없다 보니 창경궁 너머 저 멀리까지 볼 수 있어 입원 기간 동안 마음의 평온을 찾아주는 고마운 공간이었다. 실제로 오전 시간에는 이 정원에서 운동을 하시는 환자분들도 많이 계셨고 조용히 아침을 맞는 환자분들도 벤치마다 계셨다.




내가 입원했던 때는 코로나 시절이었기에 입원실에 있는 동안은 무조건 침상에 있는 커튼을 치고 있어야 했다. 그 옛날 입원했던 시기에는 커튼을 치고 싶어도 병실의 다른 분들 때문에 무조건 오픈을 해놓고 지내야 해서 불만이었는데, 내 아무리 개인의 공간을 중시하는 내향형의 인간이지만 이게 또 계속 그러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내 숨통을 트여줬던 곳이 바로 이 행복정원이었다. 마침 시기도 바깥 활동하기 딱 좋은 9월 말. 밖에 앉아 있기 더없이 좋은 날씨와 시기여서 '여기가 병원만 아니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햇볕을 쬐고 있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

명상의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약간은 찡그림 모드가 된 상태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창경궁 조망이 가장 좋은 지점에 보이는, 가을 초입에 시작하는 옅은 단풍은 저리 내다 앉으라는 알록달록 총천연 컬러의 옷을 차려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


병원에 오래 다니다 보니 병원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지간히 알아챌 수 있다. 환자 당사자와 환자의 보호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 특유의 무거운 아우라. 병원 관계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기계적인 친절과 시니컬의 조화. 그리고 그 속을 무심히 누비는, 환자도 병원 관계자도 아니지만 생업을 위해 병원을 일상으로 드나드는 사람들.

그런데 저 알록달록한 사람들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병원의 무거운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엄청나게 밝은 에너지를 마구 뿜어내고 있던 그들이었다. 창경궁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 벤치 위에 신발을 신고 올라섰으며,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연신 까르르까르르. 등장부터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멋진 사진을 남기기 위해 애쓰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그 순간 나는 내가 있는 곳이 병원인지 관광지인지 분간이 안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입고 있는 병원복이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지려고 함과 동시에 '이쯤 되면 들릴 때가 되었는데' 하며 생각하던 그 순간, 저기서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이봐요들! 아무리 그래도 여기 병원인데 신발 신고 벤치에 올라가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역시.

누군가 나서 주실 줄 알았다.



알록달록한 사람들 무리의 가까이에 앉아있던 죄(?)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슬쩍 들을 수 있었는데, 옷차림에서 이미 알 수 있었지만 서울로 단체 여행을 온 사람들이었고, 병원 앞에 있는 창경궁 관광을 위해 버스에서 하차했는데 여행 가이드가 창경궁 포토스폿으로 병원 4층을 안내해 준 것 같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기 정원까지 오려면 반드시 엘리베이터로만 이동해야 하는데 여행안내에 진심인 가이드는 이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고, 사진에 진심인 총천연색 사람들은 그 과정을 뚫고 그곳까지 온 것이었다.

입구에 너무도 떡하니 "암병원"이라고 적혀 있고 각 층마다 치료 환자들이 넘쳐나는데, 그런 곳을 지나서 굳이 엘리베이터까지 타고 올라와서는 저렇게 왁자지껄한 웃음을 내지르며 사진을 찍고 있는 그들이 새삼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런 것도 용기라면 용기겠지?


누군가의 호통 지적을 받고 난 후에야 총천연색 사람들은 당신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온 장소가 병원인 것을 새삼스레 제대로 인지한 듯했다. 밟고 올라섰던 벤치는 손수건 같은 것을 꺼내서 신속히 훔쳐냈고, 사진 찍기를 다 마무리하지 못한 것 같았는데 황급히 우르르 몰려나갔다.




한편, 이 "행복정원"은 입원 환자들에게 작지 않은 불행(?)을 안겨주기도 했는데 그것은 바로 "모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정원이 워낙에 잘 구성이 되어 있어서인지 입원실에 유난히 모기가 많았다. 낮에는 그래도 사람들이 활동을 하고 드나드는 이들도 많다 보니 잘 느끼지 못했는데 저녁 시간이 되자 이 조그마한 녀석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분명 처서가 지나면 얘네들 입이 삐뚤어진다고 했는데 일단 병원 내에서는 저 속담이 확실히 틀렸더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입원 환자들 대부분 예민력이 높은 상태다 보니 모기들의 성가신 앵앵앵 소리는 밤잠을 쫓기에 충분했고, 나 역시도 귓가에서 앵~ 하고 날아다니는 이 귀찮은 녀석들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가만 내버려 두어도 암성 통증 때문에 잠들기도 움직이기도 힘든 시절이었어서 '차라리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다니면서 네 할 일 하면, 네가 내게 가하는 피해 행위를 나도 모른 척하겠다' 같은 말 같지도 않은 바람을 기원하게 될 지경이었다.


입원 3일 차에 내 침대 맞은편에 어머니 또래 정도의 아주머니 한 분이 입원하셨다. 100 차수 가까이 항암 치료를 하고 계시다는 그분은 누가 보더라도 굉장히 씩씩해 보이셨고, 나의 상태에 대해서도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그렇지만 속 꽉 찬 응원을 보내주실 수 있을 정도로 밝고 강한 에너지를 가지신 분이었다.

그날 밤에도 어김없이 작지만 강한 녀석들의 활동이 시작되었고, 난 그저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고 '제발 잠들자' 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었는데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입원실이 밝아졌다. 어차피 커튼이 쳐져 있는 상태니 누군가 움직이나 보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뒤이어 들리는 치익치익 하는 소리.


커튼을 열어 마주한 상황.

씩씩한 아주머니 손에는 간호사실에서 가져온 모기약이 들려있었다.


이 놈의 병원은 저 정원 때문인지 모기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모기 때문에 도통 잠을 못 자겠다며 간호사실로 가셔서 불만을 제기하시고는 기어이 모기약을 가지고 오신 것이었다. 모기로 인한 불편에 대하여 동조를 구하는 아주머니께 방에 계시던 분들 모두 동의하는 의견을 한 마디씩 하고는 그 길로 바로 이뤄지는 모기와의 한 판 싸움. 입원실 구석구석, 침대 아래, 커튼 사이사이 등등 모기약을 칠 만한 곳은 어지간히 다 쳤던 것 같다. 이 정도로 약을 치면 모기뿐만 아니라 나도 잡을 수 있겠다 싶을 만큼.

아무리 무향이긴 하지만 약을 잔뜩 쳐댄 방 안에서 바로 잠드는 것은 좀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입원실 밖으로 나왔다. 밤이라 정원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나가는 순간 모기들 파티 시작!) 실내에서 휘휘 돌다 앉았는데 어머니께서 별안간 풉- 하고 웃으신다. 이유를 여쭈니 큰 병 걸려서 고치려고 들어온 사람들이 모기 때문에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 뭔가 묘하게 웃기시단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 말씀에 일리가 있다. 지금 내 몸에서 내 허락 없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이 녀석들은 모기하고는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독하고 무서운 것들인데, 그런 것들을 몸 안에 담고서는 고작 이 미물 때문에 환자의 면역력 증강에 꼭 필요하다는 밤잠까지 설친단 말인가.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질기고 강력한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암은 암이고 모기는 모기다. 내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암은 암대로 치료해야겠지만 모기는 모기대로 내 생활 영역에서 내쫓아야 할 존재인 것이다. 삶의 활력을 잃고 '모기가 뜯든 말든...' 하고 있는 것보다는 삶의 사소한 불편함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세, 훨씬 더 생생하고 적극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생생한 삶의 활력은 활력이고, 이유가 뭐가 됐든 야심한 시각에 내 몸 안에 있는 암세포 덩어리들보다도 작은 모기 몇 마리 때문에 그 난리를 치고 밖으로 피신 나와 있는 내 모습이 어쩐지 굉장히 웃겨서 어머니와 한참을 웃었다. 심지어 난 그때 뼈조직검사 직후라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휠체어를 끌고 나왔단 말이지.

모기를 피해서 잠을 포기하고 휠체어를 굴리며 바깥으로 나오다니... 삶에 대한 애착이 이 정도로 강하니 앞으로 치료도 적극적으로 열심히 잘 받을 수 있겠어 아주!!




원래 병원이란 공간 자체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어서 생사의 온갖 아이러니를 목도할 수 있는 곳이긴 하지만, 입원해 있는 5일 남짓한 기간 동안에도 이렇게 겪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덕에 이렇게 글을 쓸 소재 하나를 얻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어느덧 9월이고, 여전히 창경궁에는 단체 관광객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다. 아마 지금도 직업에 최선인 어느 여행 가이드는 창경궁 뷰 맛집으로 병원을 소개하고 있을 테고, 알록달록한 사람들은 멋진 사진을 얻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원이 있는 4층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덤불 속 음습한 어느 곳에는 작지만 강한 밤의 지배자들이 사람들이 떠나고 조용해진 밤을 기다리며 덩치와 세력을 기르고 있겠지.

궁금하다. 1년이 지난 지금도 그곳은 여전할는지.

매달 병원에 가면서 한 번도 올라가 볼 생각은 안 했었는데 이번 달에는 특별히 1년이 되는 달이니 오래간만에 올라가서 뷰 맛집을 즐기며 햇볕을 즐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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