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통증마저도 다스리는 마음이라니
나는 유방암에서 시작하여 뼈로 전이된, 전이성 유방암 환자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암 완치"라는 말이 얼마나 신기루 같은 것인가 싶지만, 어쨌든 일반적으로는 암 진단 후 5년 동안 재발이나 전이가 없으면 "완치"라는 표현을 쓰는데 유방암의 경우 10년이 지나고서야 조심스럽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계속 추적 관찰해 오던 정기검진을 종료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생각해 보면 이때에도 의료진들은 절대 "완치"라고 축하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 쳇.)
어쨌든, 나는 그 10년을 무사히 졸업한 사람이었다. 내 다시는 병원 방향으로는 그냥 지나가다도 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10년을 자축했었고(하지만 문화생활을 하기 위해선 병원 쪽을 필히 가야만 했었더랬지. 하하. 인생이란.), 넘어짐의 시간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난날의 나의 병을 완벽히 잊고 아주 힘차게 나의 인생을 꾸리며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인생을 꾸려도 너무 잘 꾸렸던 것이 문제였을까.
'혹시나...?' 하는 생각이 해가 갈수록 점차 옅어지던 어느 날, 암이란 녀석이 다시 한번 내 인생에 끼어든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활동적으로, 해보고 싶었던 하나하나 착실히 이루어가며 "인생이란 즐거운 것"이라며 입에 달고 살았던 최고 바빴던 바로 그 시기에.
그런데 또 곰곰이 잘 생각해 보면 내 몸은 이미 그전부터 조금씩 사인을 보내고 있었기는 했었다. 단지 본체가 그 사인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을 뿐.
원래 나는 공부하기를 그리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뒤늦게 제 돈 잔뜩 들이밀어서 하고 있는 대학원 공부가 몹시 즐거웠다. 아니 어쩌면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다기보다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내 모습에 내가 취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주중에 회사와 대학원에서 열일 및 열공 모드로 달리는 것도 모자라 주말까지 공부에 내줘버린 나의 스케줄이라니. 숨통은 조금 막히지만 뭔가 좀 멋지잖아!!
이렇게 열심의 모드로 경주마 마냥 앞만 보며 정신없이 내달리던 중에, 대학원 첫 학기 기말고사 기간에 도래했다. 학기 마무리를 앞두고 쏟아져 내리는 각종 에세이 과제와 시험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어느 주말. 이번 주말에는 반드시 에세이들을 마무리해야만 제출 시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에 일요일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중간중간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 날은 물과 커피를 마시는 것 외에는 밥도 세끼 모두 건넜었다.)
다 끝내고 나서 보니 밤 9시가 약간 넘은 시간이었다. 어쩐지 굉장히 뿌듯했다. 나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싶은 뽕이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가득가득 차올랐다. 허리가 뻐근하고 눈이 뻑뻑했지만 상관없었다. 나의 효능을 스스로 체감하기 위하여 일요일 하루를 온전히 쏟아부은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투자라 여겨졌다.
그런데 엉뚱한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왼쪽 엉치뼈 쪽이 너무 아팠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통증이라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아팠다. 침대에 누워 아픈 쪽을 톡톡톡 두드리며 통증을 달래보고자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때 내 눈에 진통제가 보였다. 당시 문제가 있었던 오른쪽 고관절 염증 치료를 위해 다니는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었다. 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기는 했으나 진통제 중에서는 젤 강한 것이었고 난 지금 통증을 가라앉혀야 하는 상태이니 먹어도 괜찮다는 나름의 판단을 내리고는 얼른 삼켰다. 못 움직일 정도로 아프던 통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고, 통증이 완전히 가시고나니 이 또한 굉장히 보람차면서 웃겼다. 오늘 하루 내가 공부를 진짜 열심히 하긴 했나 보군. 오래 앉아있었다고 엉덩이가 이러고 아플 정도라니. 하하하.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저 보람차면서 웃겼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던 것 같다. 오래 앉아있어서 아팠던 것은 분명 맞는 것 같은데 단지 오래 앉아있었기 때문에 아팠던 것이 아니라 병변이 숨죽이고 내 몸에서 자라나고 있던 중에 하루종일 한 자세로 강력하게 중력을 받다 보니 잠시 자신의 존재를 그때 드러낸 것이었을 터.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한동안 저 엉덩이 통증을 '공부 열심히 한 증표'라며 신나게 떠들고 다녔다.
병을 발견하기 3개월 전쯤부터는 비주기적으로 등이 그렇게 아팠다. 그 당시 같이 일하던 막내 직원에게 '혹시 너는 등 쪽이 드르륵- 하는 느낌으로 아팠던 적 없냐'라는 질문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표현할 길이 없는 통증이긴 한데 딱 저런 느낌이었다. 마치 뼈가 제자리 못 잡고 움직이는 것처럼 으드득- 대는 것 같은 느낌. 이 느낌이 드는 그 순간 움직이지 못하고 악-! 하는 외마디 비명을 내뱉곤 했는데 잠시 그 순간을 넘기면 또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곤 했다. 이때에도 나는 '나의 자세가 지금 매우 틀어져서 이런 통증이 생기는 가보다'라는 생각을 했었고, 자세 교정을 위하여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필라테스와 요가를 그렇게 알아봤었다. (실제로 필라테스는 바로 등록하려고 센터를 직접 찾아가기까지 했었으나 상담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나왔었는데, 만약 그때 등록하고 운동 시작했으면 나는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갈 수도 있었다. 이 생각만 하면 지금도 얼마나 아찔한 지 모르겠다.)
그런데, 만약 그 통증의 정도가 발병 초기만큼 강하고 상시적이었다면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어쩌다 으드득-, 쿡-, 팍- 정도였기에 그 순간만 넘기고 심호흡 몇 번 하면 괜찮았고, 일상생활도 문제없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휴직 시작일에 회사에서 걸어서 집까지 갈 수 있었지.
통증으로 인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매우 놀랍게도 휴직을 한 그다음 날 오후부터였다.
딸의 중한 상황 때문에 서울로 급히 소환당하신 어머니를 모시러 고속버스터미널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앉아있는 것이 매우 불편하고 힘들었다. 등이 너무 아파서 어떤 자세도 잡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어머니 도착 시간이 되어 하차장으로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다리가 너무 아파서 걷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어머니를 만나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들어가려고 식당에 들어갔는데 식탁 의자에 앉는 것도, 앉아서 밥을 먹는 것도 모두모두 너무 힘들었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대부분을 남기고는 어찌어찌 집에 도착을 했는데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계단을 오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무조건 4층까지 계단을 올라야만 집에 들어갈 수 있는데 오르는 내내 '이렇게 올라가고 나면 내려올 땐 어째야 하나'라는 걱정을 할 정도로 극악의 고통이었다.
그렇게 나는, 암성 통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몇 개월을 보냈다.
성장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극한 상황에 내몰린 주인공에게 '마음먹기에 따라 몸의 힘듦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라고 하며 더 힘을 내도록 독려한다. 그리고 그 말에 기운을 차린 듯 주인공은 지친 몸을 일으켜 으쌰- 를 외치며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독백을 거친 후 힘듦을 이겨내고 기어이 미션을 완수한다. 이는 비단 드라마나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운동 경기를 관람할 때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는 상황이다. 더 이상 낼 힘이 있을까 싶은 순간에 관중의 응원으로 일어서기도 하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극복해내기도 한다.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경기에서 1세트에 무릎 부상을 입고도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준 안세영 선수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난 이 선수와 개인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지만 마지막 세트를 볼 때는 눈물이 나서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내가 느꼈던 통증 역시 이와 유사한 연장선 상에 놓아도 될 것이다. 맨 처음 극렬한 통증을 느꼈던 전이 진단 1년 전의 엉치뼈 통증이 만약 전이암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그 당시에 알았다면 고작 진통제 한 알로 몇 달을 아무렇지 않게 보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암으로 인한 휴직에 들어간 지 하루 만에 통증으로 일상이 와르르 무너진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래?
차이는 그저 "내가 느끼는 지금의 고통이 암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지 여부였다. 사실 이 지독한 암은 아마도 내가 눈치채기 훨씬 오래전부터 내 몸에서 나와 함께 하고 있었을 것이다. 보통 검진으로 잡아낼 수 있는 암이 최초로 발현되기 시작하는 시점은 적어도 10년 정도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하니. 단지 의학적으로 "넌 이제부터 암환자"라고 명명해 주며 나라에서 받을 수 있는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끔 변한 것뿐, 내 몸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느끼는 통증의 정도나 빈도는 내가 알아채기 전과 후가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물론 난 환자이기에 내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무뎌지면 안 된다. 그 무뎌짐이 병세의 악화로 직결될 수 있기에. 하지만 무뎌지지 않는 것과 예민해지는 것은 조금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환자라는 것은 자각하되 이를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여서 일상생활에까지 지장을 받는 것은 내 몸에 결코 좋은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암환자들이 겪는 어려움 중 가장 다루기 어려운 것이 마음의 힘듦이다. 한순간에 환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치료함에 있어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 과정을 모두 종료하더라도 언제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 등 마음을 괴롭히는 상황이 너무 많다. 이미 환자가 되어버린 상황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 무조건 수용을 해야 하겠지만(사실 이 부분에 대한 수용이 제대로 안 되는 분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재발과 전이를 걱정하며 평범한 일상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은 힘든 치료를 마치고 씩씩해진 몸에게 마음이 계속 불안 요소를 집어넣는 것인데 대부분의 치료를 마친 암환자들은 이 생각에서 쉬이 벗어나질 못한다.
나 역시도 재발과 전이를 늘 불안해하며 살았던 사람이었는데, 불안에 떨던 상황이 현실이 되고 보니 지난 시간들이 못내 아쉽다. 불안해할 시간에 다른 즐거운 것들을 하는 것이 훨씬 내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그걸 뼈전이가 된 4기 환자가 되고 나니 비로소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인간사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원래 유익한 깨달음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 것이니.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내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허락되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땅에 발붙이고 살 때까지는 최대한 즐겁고 평온하게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을 이렇게 먹으니 그다음에 해야 할 것들은 자연스럽게 보이기 시작하더라.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마음을 먹고 잘 살고 있으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나보다 훨씬 더 잘 살 수 있다고 감히 장담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