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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나 Sep 17. 2023

죽음이 알려준 삶의 의미

1. 죽음이 가까워오면 삶에 훨씬 많은 가치가 실리기 마련

2022년 9월.

난 그저 고관절과 허리에 통증을 느껴서 병원을 갔을 뿐인데 상황을 부정하고말고 할 틈도 없이 별안간 "유방암 4기 환자"가 되었다.

2009년 12월에는 "암"이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에 엄청난 충격을 받긴 했어도 그 알량한 "1기"라는 것 덕분에 죽음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4기가 되었다는 것은 최초 병변이 발생한 유방 외에 타 장기로의 전이가 생겼다는 것이고, 지금 치료가 잘 되고 있다고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다른 곳에 추가 전이가 발생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진단서에 적혀 있는 병 코드와 설명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정말 그야말로 새하얘졌다.

아무 생각도 안 든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가끔 궁금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는 알고 싶지 않았다고.




진단을 받고 본격 치료에 들어가기까지 약 한 달 정도의 뜨는 기간이 생겼다.

병임을 인지한 날로부터 나날이 격해지는 통증 때문에 외출은 고사하고 집 안에서 화장실 한 번 가는 것도 힘들어진 나는 그 당시 혼자서 정말 많이 울었었다.

강한 척을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가족들에게 괜한 걱정을 하게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다 보니 2009년 처음 진단받았을 당시에는 가족들 앞에서는 안 울고 꾸역꾸역 잘 참아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내게 떨어진 무게감이 쉬이 감당해 낼 수 있는 수준의 무게가 아니었던 탓에 마음을 다잡을 새도 없이 가족들 앞에서 하릴없이 무너져 내렸었다. 나 때문에 함께 힘들어하는 가족을 보는 것 역시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화장실을 가려고 침대에서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서는 통증을 억지로 참으며 한 발 한 발 내딛는데 그 당시 늘 그랬듯이 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겨우 화장실 가는 건데 이렇게 아플 일이냐고.

화장실 문을 잡고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다가 문득 들어찬 생각 한 자락.

나의 투병 라이프에는 그러니까 반드시 한 번씩은 화장실과 관련하여 눈물 이슈가 강하게 터져야 하나보다. 2009년 그 시절에는 온몸의 수분을 싹 빼앗아가버린 항암제 덕분에 변기에 앉아서는 볼 일 못 보겠다고 거하게 대성통곡을 하더니, 이번에는 화장실 문 손잡이 붙들고 또 눈물바람이라니.

이 생각이 드니 눈물을 쏟다 말고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렇게 웃음이 조금 터지고 나니 그렇게 쏟아지던 눈물이 잦아들었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앞으로 내게 닥칠 일들이 무서워서 불시에 눈물이 펑펑 터지던 애가, 겨우 화장실 에피소드 하나 떠올렸다고 이렇게 눈물이 멈추고 웃음까지 터질 일이냐고.

그럼 애초에 내가 울던 이유는 내가 인식하고 있던 이유가 아닌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고 나니 나는 나에게 진지하게 질문을 해봐야만 했다.




나는 본디 사유를 즐기는 사람이다.

MBTI에서는 생각 가장 많다는 INFJ, 버크만 진단에서는 모든 코드가 파란색 분면에 자리 잡고 있을 정도며, 나를 정의하는 핵심 키워드로 "생각"을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나란 사람이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생각 자체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분명 많은 생각은 했으나 그 생각의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않고 그저 생각 그 자체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를 우울한 상태로 끌고 간다는 것을 몇 번 경험한 후에는 아예 생각 자체를 하지 말자는 쪽으로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곤 했다.

그러나 사유를 즐기는 내가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리 오래지 않아 깨닫게 되었고, 그다음에 내가 취한 방법은 머릿속에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는 생각들을 어떤 식으로든 정리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보니 생각에서 감정을 분리해 내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고, 감정이 제거된 생각을 꼬꼬무 스타일로 조금씩 정리해 나갈 수 있었다.


통증을 참고 화장실을 가다 말고 툭 터진 눈물과 픽 터진 웃음. 그리고 이내 잦아든 감정의 요동침.

여기서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나는 지금 왜 울고 있는가'였다.

아래 나열하는 문답은 실제로 내가 몇 달에 걸쳐서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들과 그 질문에 대한 답들이다.


 - 나는 지금 왜 울고 있나

   = 지금 내게 닥친 현실이 너무 가혹해서

 - 어떤 점이 가혹한가

   = 아직 살 날이 많은데 이런 지독한 병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게 가혹하다

 - 죽는 것이 무서운가

   = 무섭다

 - 죽는 것이 왜 무서운가

   = 내가 죽으면 남아있는 사람들이 힘들어할 테니

 - 그건 남은 사람들의 몫이지 내가 힘든 것은 아니지 않나. 내가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무엇인가

   =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삶을 마감하게 될까 봐

 - 그건 무서운 게 아니라 후회의 감정이지 않나. 후회를 안 남기려면 지금부터 하고 싶었던 것을 하나하나 해나가면 된다. 그런데 나는 분명 죽음이 무섭다고 했는데 무서운 이유는 무엇인가

   = ......?


저기까지 질문을 하고 나니 더 이상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내가 순간순간 눈물이 터졌던 이유는 죽음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왜 이 죽음을 무서워하며 눈물을 흘리는지에 대해서는 도통 모르겠더라. 질문이 저기까지 다다르고 나니 내가 우는 이유가 정말 죽음 때문이 맞는지 조차도 알 수 없었다.




공황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MMPI 검사에서 '예기 불안' 항목 점수가 높게 나오는데, 예기(豫期)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하여 미리 생각하고 기다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아직 닥쳐오지도 않은 일에 대하여 높은 불안감을 가진다는 것이다.

각종 진단 도구에 관한 공부를 하면 1번 케이스는 늘 나 자신이 된다. 이런 도구들로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생각보다 꽤 재밌기 때문이다. 하여 MMPI 역시 자격 공부를 하며 검사를 시행했는데, 나의 예기 불안 점수는 병증까지는 아니었지만 일반적인 사람들보다는 좀 더 높은 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내 인생에 잔뜩 쌓여있던 그 많은 불안들이 다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었구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무수한 사유의 시간을 보내다 문득 예전에 받았던 MMPI 검사 결과가 떠올랐다. 예기 불안!!

이 항목을 대입하여 내가 부지불식간에 쏟았던 눈물들을 해석해 볼 수 있겠구나!!!

그러니까 나는 새로운 일을 직면함에 있어 불안감을 남들보다는 좀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이고, 그러니 이 병을 마주하면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무섭고 힘들었던 것일 터!

실체도 없는 예기 불안을 붙들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안타까운 중생이여. 에휴. 토닥토닥.

내 안에, 막연한 불안감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를 충분히 위로해주고 난 후 그동안 찾지 못하고 있었던 답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는 의료진들조차 쉬이 예상할 수 없는 영역일 텐데 그런 걸 붙들고 계속 불안감에 떨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내버리면 그것이야말로 앞으로 남은 나의 삶을 너무 무가치하게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지는 오롯이 하늘만이 알고 있을 테고, 그러니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붙들고 있지 말고 나는 그냥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여 즐겁고 의미 있게 지내는 것이 훗날 돌아봤을 때 훨씬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고 나니 그동안 나를 잠식하고 있던 실체 없던 두려움들이 조금씩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물론 이런 와중에도 문득문득 감정이 크게 올라오면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눈물을 와락 쏟아내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그 무거운 감정에 잡아먹히지는 않는다. 지금 내 상황에 이 정도의 눈물도 안 흘리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이지!!! 하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던 내 마음을 주섬주섬 챙겨 흙먼지 툭툭 털어내고는 다시 제자리에 올려둔다. 잘하고 있다는 응원과 함께.

실컷 울었으니 이제 할 일 하자 모드로 돌입하여 내 앞에 산적해 있는 과제들을 씩씩하게 쳐내면서, 나는 그렇게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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