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감기에도 로맨스가 있다.

by 희노가

예전에 <평생 감기에 걸려 삶의 의지를 잃은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단편소설처럼 쓰다가 역시 감기만으로 삶의 의지를 잃는다는 건 좀 억지인 것 같아서 그만뒀지만.


지금 나는 마침(?) 캘거리발 감기에 독하게 걸려서 이 주째 고생하고 있는 중이다. 감기는 중한 병은 아니지만 걸리면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감기는 이름도 참 많다. 목감기, 코감기, 기침감기, 몸살감기..


처음에 '감기'라는 단어를 떠올릴 땐, <감기> 영화가 생각났었다.

이 영화는 예전 2013년에 개봉한 한국영화로, 치사율이 높은 호흡기 바이러스로 대재난을 겪는다는 내용이다. 메르스, 코로나19가 발병하기 전에 나온 영화로 소재에 있어서는 앞서 나갔다고 할 수 있겠으나, 줄거리가 억지스럽고 캐릭터들에 공감을 할 수 없는 졸작이었다. 해외에서는 'FLU'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는데, 감기(common cold)와 독감(influenza)은 엄연히 다른 것으로 제목부터 틀렸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내가 평론가도 아니니 비난은 이 정도로 해 두고 넘어간다.


다시 돌아와서, 감기는 독감과 달리 감기 자체로 죽는 사람은 거의 없고 감기약 또한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뿐 시간과 휴식이 약이다. 한국에 돌아와 제대로 휴식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몸이 신호를 준 것이 감기일까?


평소 감기에 자주 걸리지는 않는데, 이번에 감기를 오래 앓다 보니 감기를 걸렸을 때의 '추억'이 소환되었다. 아, 그렇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이하 *같사남)와 처음 만난 날에도 나는 심한 감기에 걸려있었다.


날짜도 지금과 비슷한 겨울의 이맘때다. 하필이면 만나기로 약속한 날에 목감기에 잔뜩 들어, 목도리로 칭칭 감고 기침을 콜록거리면서 강남역 1번 출구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공교롭게 이름이 친오빠와 같다는 것과, 첫 통화에 자기가 강남역 쪽은 잘 몰라서 만날 레스토랑을 예약해 줄 수 있냐던 목소리만 아는 남자다.

친구가 준 정보는 아주 한정되어 있었고, 벌써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었는데 연락이 안 와서 슬슬 짜증이 날 무렵, 저쪽 앞에 있는 남자가 계속 휴대폰을 든 채로 갸우뚱하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혹시 저 사람인가'


몇 분 후 통화가 되었는데 그 남자가 맞았다. 갑자기 전화가 먹통이 되어서 연락이 안 되었다고 한다.

같이 걸어가며 힐끗 보니 약간 호리호리한 체격, 눈이 날카롭게 생겼는데 피부가 하얗고 표정이 생글생글 웃고 있어서 날카로움을 덮어 주는 듯했다.


사실 레스토랑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 레스토랑의 음식이 맛이 없었다는 것 밖에. 그 남자도 그저 그랬는지 음식을 좀 남기고 2차로 맥주를 마시러 가자길래 길 건너 잘 아는 이자카야로 가자고 했다. 강남거리의 언덕을 오르는데 찬바람에 기침이 나와 연신 콜록대면서 가다가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양해를 구하고 잠시 받았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 이 남자가 보고 있다가 이런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엇, 00 씨는 아이폰이네요. 저는 어른폰인데."

첫 만남에 그런 하향개그를 치다니 무슨 짓인가. 어이없어하는 내 얼굴을 본 남자는 뒤이어 말했다.

"이게요. 지금은 어이없잖아요. 근데 이불개그라고 자기 전에 이불속에서 생각하면 웃겨요."


결국, 그 남자의 예상이 맞아떨어졌고 나중에 이불속에서 같이 웃는 사이가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감기에 걸렸을 때 만난 사람과 완결된 로맨틱 코미디가 있었으니, 이것 또한 '감기'에 대한 추억이 될 수 있겠다. 이렇게 *같사남과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보니 또 하나 생각난 이야기가 있다.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교2학년 때, 동아리방에서 처음 마주친 선배가 있었다.

동아리방에 들어선 시간은 공강시간이었고, 쇼파에서 자다 일어난 그 선배는 나를 보자 대뜸 자기 소개를 하더니, "밥 먹을래?" 하더니 짜장면을 시켜줬다.

그땐 내가 짜장면 하나를 다 먹지 못하던 시절이다(나약했구나. 우습다). 짜장면을 먹다가 남겼는데 그 남자선배가 "이거 안 먹는 거야?" 하면서 내 그릇을 들길래, 내가 얼른 "저 감기 걸렸어요. 드시지 마세요. 옮아요"했다. 그랬더니 그 선배는 싱긋 웃으면서 "괜찮아"하면서 내 그릇까지 싹싹 비워냈다. 얼마 뒤, 그 선배와 나는 CC가 되었다.


나의 서사에는 '감기'와 함께 시작된 로맨스가 두 장면이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오늘부로 감기에 대한 기억을 졸작 영화가 아닌 내 실제 로맨스로 덮기로 한다.


어쩌면 감기는 귀찮고, 지긋지긋하고, 흔하지만 아픈 병이다.

그러나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감기에 얽힌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이미 결혼을 한 나는 감기로 로맨스를 꿈꾸지 않지만, 감기에 걸리자 내 곁의 두 남자들이 정성으로 같이 걱정해주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옮기지 않기 위해 집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는 중이다.

이것도 충분히 로맨스다.


감기와 함께 제대로 된 휴식을 위해, 집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아이와 함께 볼 예정이다.

영화가 끝날 쯤이면 내 감기도 나아있길 바라본다.


당신에게 '감기'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삶은 축제다"

-희노가


*1화: '시작'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