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게 한 ‘음악’

거창한 건 필요 없어요.

by 희노가

예전에는 사람들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음악감상’, '독서'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이제는 취미들이 더욱 다양해지고 디테일해져서, 취미가 ‘음악감상’이라고 하면 구닥다리로 취급받을 수도 있으려나.


내 대학교 시절은 온통 '음악'에 둘러싸여 있었다.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을 하는 음악감상 동아리를 들었다.

그곳에는 늘 누군가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고, 주기적으로 [음감회] 같은 걸 해서 돌아가며 발표를 했다.

장르도 다양했다. 재즈에서 락까지. 누군가는 제3세계 음악을 듣기도 했다. 다들 음악을 듣는 것에 꽤나 진지했다. 본인이 [음감회]에서 발표를 하는 날이면 플레이리스트(Play list)가 적힌 프린트를 모두에게 나눠줬다. 음악을 다 들은 후에는 뒤풀이로 짜장면파티와 술자리가 이어진 것은 덤이다.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기도 했다. 아마도 지금까지 가장 낭만적이었던 시절이라고 해도 좋겠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고, 잘 들었고, 취향이라는 것이 당연히 존재했지만 한 장르에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반면 그곳의 선배들과 동기들은 가령 브리티시 록이라던가, 헤비메탈, 프로그레시브, 포크 등 좋아하는 장르들이 뚜렷한 사람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더러 음악을 만들거나 연주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으면서도, 다른 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설명하고 들려줄 때는 열린 마음으로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곳을 정말로 좋아했다.

4년이 좀 넘는 시간 동안 전공과실보다 동아리방에서 보낸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분위기가 그리워 직장에 들어간 뒤에도 주말에 가끔 찾아가곤 했다. (역사가 꽤 길었던 동아리는 지금 없어지고 말았다.)


그때만 해도 모두들 음악을 들을 때 MP3파일이나 CD로 들었다. LP판을 선호하는 선배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 스트리밍 해서 음악을 듣는 시대가 되었다. 저장해 놓은 플레이리스트가 인터넷상에 있을지언정, 더 이상 '음악'을 소유하지 않는다. 나아가 내 취향을 AI가 파악하고는 들을 음악을 추천까지 해주는 시대라니. 그땐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다.


'음악'이라는 단어 하나로 이렇게나 많은 추억을 가져올 수 있다니 놀랍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음악'에 얽힌 추억이 아니다.

대학교 시절에 음악에 둘러 쌓여있다고는 해도,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듣지는 않았었다. 그것은 뭔가 내가 듣기엔 너무 어렵고 교앙 넘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 클래식 음악을 곧잘 찾아 듣게 되었다.

수년 전 일본에 있을 때, <노다메칸타빌레>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원래는 만화가 원작). 그 드라마는 클래식 음악을 하는 대학생들의 음악과 청춘이야기로, 드라마 상에서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베토벤의 교향곡, 쇼팽 피아노 곡들이 서사와 어우러져 클래식 음악을 OST로 한창 들었다. 그리곤 또 잊고 지냈다.

2022년 6월,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우리나라 임윤찬 군이 1위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튜브로 연주를 듣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클래식 음악 연주영상을 바로바로 휴대폰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인류의 대단한 쾌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담이지만 2022년에 열린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COVID-19로 인해 1년 연기된 것으로 만약 2021년에 열렸다면, 임윤찬 군은 최소연령 규정에 의해 출전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즉 연기된 덕(?)에 최소연령 규정을 충족(임윤찬 군은 2004년생)하였고, 그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그 뒤로 임윤찬 군의 연주를 종종 들었는데, 그중에서도 결선에서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정말로 가슴 뜨겁게 들었다.

갑상선에 병에 걸려 요가원도 그만두고 집에서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좋아하던 음악과 새로운 음악들을 발견해 듣는 날이 많아졌고,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연주영상은 거의 다 찾아서 듣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에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듣다가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와서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집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것도 호르몬 탓인가 싶었으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만들어진 배경을 찾아보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러시아의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첫 교향곡이 기대보다 실패하자, 작곡가를 그만둘 만큼 큰 우울증을 겪었다. 그러던 중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을 만났고, 의사는 그에게 끊임없는 자기 암시 최면을 걸으며 치료를 했다. 마침내 라흐마니노프는 병적 우울증을 극복하고 이 세기의 명곡을 만들어냈다고, 그 곡을 의사에게 헌정했다.

역경을 이겨낸 라흐마니노프의 곡에는 사람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힘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임윤찬 군뿐만 아니라 수많은 연주자들이 각자의 감성으로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그중 러시아 연주자 니콜라이 루간스키의 연주가 마음에 남는다. 2023년 서울에서 KBS교향악단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했던 영상은 당시 손가락이 찢어지는 부상이 있던 채로 연주를 했다고 하는데 너무도 힘 있고 아름다워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오래도록 들었다. 당시 거기에 계셨던 분, 부럽습니다.


러시아는 훌륭한 작곡가와 연주자를 많이 배출한 나라지만, 아직도 전쟁을 벌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은 어쩌면 인생의 아이러니와 닮아있는 것 같다.

어쨌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은 듣다 보면 하늘에서 별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이 대단한 곡을 작곡, 연주한 그 후에도 100년이 넘게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제2,3,4.. 라흐마니노프가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나 역시 늦었지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만나게 되어 고맙다.

또한 클래식음악에 대한 흥미가 생겨 여러 클래식 음악가의 곡들을 찾아서 듣고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이 이렇게 좋았구나. 모든 게 만나지는 때가 있나 보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종 취향문제로 번지기도 하고,

누군가의 음악취향을 폄하하는 경우를 본다.

하지만 음악을 듣고 감상하는 영역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 누구는 뭐가 최고라 따라갈 자가 없고, 누구는 누구보다 못한데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해 못 하겠다면서 자신의 감상과 평가를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걸 보면서 우아한 음악을 듣는다고 해서 그 사람까지 우아한 건 아니라는 것과, 클래식 음악은 잘 모르고 트로트 음악을 좋아하는 우리 엄마가 훨씬 교양 있어 보이기도 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소개하고 권유할 순 있어도, 그것이 강요가 된다면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이다.

나를 살리는 '음악',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나에게만 해당할 수 있다.

물론 라흐마니노프처럼 많은 사람들을 살린 음악도 있지만 말이다.(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내 인생에서 '나를 살게 한 음악'이 있다는 것,

나를 위로해 준 '음악'이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음악'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있던 며칠 덕분에, 젊고 빛나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했다.

또 아팠을 때 위로해 준 음악들을 연이어 들어보았다. 글을 쓰면서 손열음 님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을 들으며, 섬세한 연주에 한 번 더 위로받았다.


'음악'은 역시 좋은 거다.


당신을 살린 '음악'이 있나요.


"삶은 축제다"

-희노가


단어가 불러오는 마음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지난 단어: 시간


화, 금 연재
이전 08화'시간'을 되감을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