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푹 자고 일어나서

오랜만에 꿈에서 만난 그 애 & 하루 기록

by 헤엄


(1).

소파에 누워,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곧 잠들겠다는 생각이 손길로 나타나, 점차 손은 느려져 갔다. 그즈음 오늘로써 업무 마감까지 4일 남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커다란 것에 눌린 사람처럼 일어날 수 없었다. 일어나서 하면 되지. 거의 다 했으니까 조금 더 자고 일하자. 아직 하루는 여덟 시간 넘게 남았는걸. 소파 담요를 끌어당기면서 두 시간만 잘 생각으로 눈 감았다.

눈 떴다.

오전 8시 50분이었다.

이상하다. 잠들기 직전에 확인한 시간은 오후 5시쯤이었는데, 왜 오후가 아니라 오전 8시 50분인 걸까. 휴대전화가 드디어 고장 난 걸까. 3년이면 오래 쓰긴 했지. 문제는 창 너머가 지나치게 밝았다. 여름에는 해가 길어진다지만 지금 저 해는 막 시작된 게 분명했다.

망할.

난 아직 어제여야 했지만, 어제는 끝났다.

업무 마감이 갑자기 3일 남은 거다. 단지 눈만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초능력자한테 시간을 도둑맞은 사람 심정이 단번에 이해됐다. 이토록 허무했겠구나. 허무하든 말든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또 시작했을 수도. 초능력자 또는 시간에 덤벼 봤자 이야기 흐름을 보면 시간 낭비니까.




(2).

나도 초능력자였다면 난 아마 잠으로 현실을 물리치는 능력을 보유하지 않았을까. 언제 눈 감든 원하는 만큼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 그게 나한텐 있다.

나에게 잠은 스트레스 파악 방법이다. 오래 자면 스트레스가 과한 상태, 수면 시간이 짧아질수록 인생이 행복해졌다는 증거다. 행복할수록 자는 시간이 아까웠다. 잘 시간에 눈 뜨고 있으면 조금 더 오래 행복을 만끽할 수 있어! 그 생각으로 행복해지기만 하면 하루 서너 시간밖에 안 잤다. 그와 달리 괴로울 때면 푹 자서 끊임없이 현실과 멀어졌다. 어쩌면 이런 나야말로 굉장한 초능력자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잠만 자야 했을까.

하도 오래 잤더니 이렇듯 현실 감각도 동면했다. 초능력자고 나발이고 현실에서 난 뭘 해 왔더라. 불부터 켜고, 침대 앞 책상을 눈으로 쓱 훑었다. 자기 전마다 책상을 치우던 나였지만, 어제는 그럴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덕분에 책상은 어질러진 채였다. 다행히 어질러진 책상엔 현실과 관련된 증거가 차고 넘쳤다. 제일 눈에 띄는 건 플래너였다.

만에 하나 누가 내 몸을 차지하더라도 내 플래너만 보면 나로 살아갈 수 있을 테다. 나는 미래의 나를 못 믿는다. 하도 못 믿어서 월요일마다 일주일간 해야 할 일을 미리 적어 둔다. 그뿐 아니다. 예상 못 한 상황이 벌어져도 플래너에 적힌 대로 움직이게끔 승부수를 남겨 둔다. 예를 들자면. 네 적은 어제도 일을 했다. 적어도 어제의 너보다는 열심히 살아라. 후회하고 싶어? 뭐 이런 말들. 적을 두고 살진 않지만, 승리욕만은 웬만한 전시 상황을 뛰어넘는 나였기에 일부러 플래너 곳곳에 미래의 나를 향한 승부수를 던져둔 셈이다. 매번 과거에 남긴 승부수가 비수로 꽂히는 나는 금세 타오르는 승리욕으로 어제 해야 할 일과 오늘 해야 할 일을 둘러봤고, 일단 어제부터 살기로 했다.

이제부턴 진짜 초능력자인 셈이다.

어제로 돌아가서 어제 할 일을 해치울 생각이므로.




(3).

어제의 나는 업무를 다 끝내야 했다. 그래야 오늘과 내일의 내가 업무를 정리하고, 회의 준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대체 월요일의 나는 얼마나 나를 믿은 건지 하루 만에 이걸 다…. 그래도 군말 없이 서둘러 짐을 챙겼다. 집에 있어 봤자 종일 잤던 어제의 나를 욕하기만 할 테니, 무작정 어제인 양 카페로 출근하는 거였다.

이후 끼니도 거른 채 어제 해야 할 일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월요일의 나는 아무래도 선견지명이 있던 게 분명하다. 월요일마다 점집이라도 차릴까. 절대 못 할 줄 알았으나 세 시간쯤 지났을 때 이미 어제는 끝나가고 있었다. 하루도 안 되어서 업무를 마감했고, 이후로는 서평단에 참가한 책을 어제 목표 분량만큼 읽고, 필사까지 마친 다음 어제 내가 보상으로 받아야 했을 드라마를 켰다. 드라마가 끝나갈 즈음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열두 시 삼십 분.

어제 나에게 필요했던 시간은 딱 다섯 시간이었다.

푹 잘 만했다며 나를 토닥여 주고 곧바로 오늘을 시작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달려야 한다. 점심 까짓 거 미루고, 오늘 해야 할 업무에 집중한다.

오후 네 시.

오늘도 끝났다.

이쯤 되니 의문이었다. 월요일의 내가 선견지명이 있는 건지. 아니면 쫓길수록 빨라지는 건지. 과연 어제 안 자고 일했으면 이 정도로 빠르게 모든 걸 해치웠을까. 턱 괸 채 한 손으로만 플래너가 지시한 일 위에 줄 북북 긋는 동안 호기심은 참을 수 없이 커졌다. 왜 이걸 다 해낸 거지? 자괴감이 들이닥칠 시간조차 없이 다 해낼 줄이야. 가만히 카페 테이블에 엎드렸다. 왜 나는 다 해내고도 자화자찬이 아니라 의심하는 시간만 보내는 걸까.

이러니 잠이 늘지.

아무래도 최근 마음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남아, 또 나를 못 믿나 보다. 의심에 시달리며 어떻게든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겠지. 그럼에도 해냈다. 아무리 못 믿고 도망쳐 봐라. 해내 줄 테니. 그런 생각에 웃음도 났다.


내 생각엔 요즘 나와 나의 싸움이 요란해진 것 같다. 싸우거나 말거나 미리 해야 할 일을 정해 둔 내가 내심 대견하기도 했다. 월요일의 나는 요 며칠 나와 나의 싸움에서 중재자가 되어 주고 있지 않나. 이쯤에서 내 안에는 내가 너무 많다는 가사도 떠올랐다. 이렇듯 여러모로 복잡했지만, 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냥 일어났다.




(4).

잘 자길 바라는 마음이 사랑 같다는 말을 곱씹는다.

나는 내가 못 잤으면 좋겠다. 얼른 눈 떠서 또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가, 서너 시간 만에 눈 번뜩 떴으면 좋겠다. 눈 뜨자마자 덮치는 기억이 죄다 우중충해서 빗소리에 휘말리듯 또 잠들지 않기를.

그러면서도 잘 자길 바라는 마음은 기어이 사랑과 닮았는지 지금 나는 내일의 나를 생각하며 열심히도 뭘 하고 있다.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갈 내가 푹 자고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도록 최대한 플래너를 다 지워 둔다. 그렇게 내일 해야 할 일을 미리 하고 나선 내일 읽고 싶은 책을 예약해 두기도 한다. 어제 잠들기 직전까지 읽은 책을 마저 다 읽는 중이기도 하다. 설령 내일도 어제처럼 종일 잔다 해도 괜찮도록 내일 브런치에 올릴 글 역시 오늘의 내가 짧게나마 써 준다. 언제 일어나도 괜찮아. 언제 일어나도 쓸 수 있을 만큼은 오늘의 내가 서두를 써 뒀어. 어제의 나는 안 해 뒀더라. 나쁜 자식. 그래도 어제보단 오늘 내가 덜 나쁘니까 내일의 나는 더 자도 괜찮아.


이러면 내일의 내가 슬쩍 일어나지 않을까. 어제처럼 푹 잠들 뻔하다가도 도서관에 가고 싶어질 테니. 혹은 미리 써 둔 서두를 릴레이 소설로 삼고 싶을지도. 이로는 부족하다 해도 내일의 나는 플래너와 눈싸움할 시간에 모레의 나를 위해 움직여 주지 않으려나.

이쯤 되니 잘 자길 바라는 마음은 역시 사랑 같기도 하다. 나 역시 내일의 나에게 기대를 걸어 두면서도 푹 자고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도 슬쩍 남겨 두었으므로. 그래도 언제까지고 꿈을 현실 도피처로 삼을 순 없으니,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밤에는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피처가 너무나도 안락하다 보니 자꾸만 현실을 내팽개치고 만다.




(5).

어제에서 오늘로 넘어오는 밤.

또 그 애를 만났다. 나에게는 ‘그 애’가 있다. 그 애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키가 나보다 큰지 작은지도 모르고, 뭘 하는 애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그 애’는 목소리와 짜증 정도. 그리고 또 하나 아는 건, 그 애는 내 꿈에서만 존재한다.


약 9개월 전쯤. 그 애가 내 꿈에 나타났다. 그러니까, 그 애가 내 꿈의 주인공이 된 지도 벌써 9개월째였다. 한 6개월간은 잠만 들면 만났고, 내 연애 최대 기간인 6개월을 넘기고부터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만나고 있다. 내가 남한테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드세고 못된 그 애는 나와 만날 때마다 온갖 일로 트집 잡고, 깨어나기 직전부터는 거의 세상 떠나가라 나한테 뭐라 한다.

그럼에도 꿈속 나는 그 애를 사랑한다.

심지어 곧 1년이 다 되어 가건만. 여전히 사랑한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나는 나보다 목소리 큰 사람을 싫어한다. 게다가 말도 화도 많은 사람은 더 질색이다. 나는 나를 진정하게 하는, 잔잔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 애’는 내 꿈을 매번 떠들썩하게 한다. 꿈이라는 장소 특성상 그 애가 화를 내면 세상이 무너지고, 좀비가 쏟아지며, 때때론 아예 외행성으로 쫓겨날 때도 있다. 문제는 꿈을 조종할 능력이 내겐 없다. 꿈속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나는 군말 없이 그 애를 사랑하고, 매번 그 애를 달래다가 깨어난다. 저번에는 그 애가 어차피 넌 다 잊을 거라고 목 놓아 울었다. 열받게도 그 장면만 안 잊혀서 종일 ‘내가 널 어떻게 잊어?’ 하고 통속극 주인공 흉내나 냈다. 또 다른 저번에는 절대 꿈에서 깨지 말라기에 알겠다고 했는데, 그와 동시에 깨 버렸다. 그날 잠들기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또 얼마나 잔소리해 댈까.

그래도 꿈속 나는 그 애를 사랑한다.

이번 꿈에서도 그랬다. 약 한 달 만에 그 애와 만났다. 문제는 꿈속 나는 한 달 만의 재회가 그저 그랬는지 그 애 손만 꼭 잡고 있었다. 그 애는 그런 나한테 또 화를 냈다. 이번에도 금방 가기만 해. 죽여 버릴 거야. 그 애가 화를 내면 내 꿈에는 온갖 재난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번 꿈에서도 세상이 멸망하는 방법 101가지를 겪고 왔다.

“너 또 갈 거잖아! 죽어!”

결국, 깨어나기 직전엔 이런 말이나 해 대는 그 애. 깨어나고 보면 왜 그 애를 사랑했는지 도통 알 수 없어진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깨어나기 전까지는 깨어나고 싶지 않다. 계속 잠들어서 그 애랑 세상 모든 멸망을 겪고 싶을 뿐이다. 어제도 잠깐 깼지만, 그 애를 달래주고 싶어서 얼른 몸을 웅크렸다. 다행히 어제는 그 애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준 건지 이어지듯 그 애와 다시 만났다.

심지어 이번엔 현실 속 나도 그 애가 반갑긴 했다. 오히려 꿈속 나보다 현실 속 내가 그 애를 더 보고 싶어 했던 것도 같다. 지금도 그 애 생각을 하며, 이런 글이나 쓰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 그 애와 만난 순간을 모아, 쭉 써 보고 싶기도 하다. 깨어날 때마다 대충 플래너 귀퉁이나 휴대전화 메모에 적어 둔 그 애를 잘 기록하고 싶어질 만큼 현실 속 나도 그 애를 은근히 좋아하긴 하는데,

한 달 뒤에 와 주면 안 될까.

요즘은 내가 너무 바빠. 게다가 스트레스받는 일 때문에 자꾸만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기도 해. 사람은 절박해질수록 뭐든 쉽게 사랑해 버린다잖아. 이러다 내가 현실 다 제쳐 두고 오로지 너에게만 매달리지 않게끔 한 달 뒤에 와 주면 안 될까. 한 달간 열심히 살고, 또 꿈에서 달래줄게.





(+ 1)


꿈에서만 만나는 그 애를 기록해 뒀던 글을 덧붙여 둡니다. 아래 글은 5월쯤 썼던 글이에요. 어제 자느라 놓친 하루 기록을 대신한다고 생각해 주세요. 언젠가 또 꿈에 나온다면, 그땐 더 자세히 들고 와 보겠습니다!



(+2).


나도 부지런하다. 누군가와 함께 누웠다면 그 누군가는 이미 진즉 침대를 떠날 만큼 부지런하다고. 특히 요즘 아침은 인생에서 가장 부지런해졌다. 여태 구겨졌던 몸 한껏 더 구기며 눈 뜨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기억 속으로 구겨 넣느라 그랬다. 현실에선 고작 여덟 시간이 지났지만, 방금 전까지 나는 그 애와 몇 달을 보냈다.

그 애.


몇 분 전만 해도 사소한 것 하나하나 기억했지만, 지금부터는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 애.


겨우 단면만 남은 그 애는 잘라진 단면마다 어찌나 날카로운지 눈만 뜨면 억울해지곤 했다. 왜 그 애는 꿈이 끝나갈 때마다 나에게 화를 내는 걸까. 그렇게 화가 나면 이젠 찾아오지 말든가. 그렇게 내가 별로면 다른 꿈으로 바뀌든가. 그렇게 다 싫고 미우면서 왜 날카로운 단면 사이사이에 서로 죽고 못 사는 단면도 끼워진 것인지.

벌써 반년째였다. 단 하룻밤 사이에 그 애와 몇 달 또는 몇 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애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코앞 복권 판매점으로 달렸다. 그 애 손등에 13과 21이 적힌 것만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다 눈만 감았다 하면 그 애가 보이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는 눈앞 무엇이든 시야를 채울 수 없도록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뭐 그리 잘났다고 아침만 오면 휘발되어 사라져 버리는지. 고작 반년째 꿈에서 본 게 뭐라고 정이 들어 버리는지. 조금이라도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몸 웅크리며 기억 속으로 차곡차곡 그 애를 쌓았다. 그 애는 습관이 됐다.

이후 가만히 침대 옆벽을 봤다. 조금만 더 잘까. 조금만 더 자면 그 애의 화를 풀어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마침 오전 일정도 없으니 오래오래 볼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나 금세 서둘러 일어서는 나였다.

왜 늑장 부리지 않아? 절대 묻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 그 애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생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알았다. 욕심내면 낼수록 모두 멀어졌다. 그 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랬다. 게다가 그 애는 모든 인간과 다르게 지나치게 유한했다. 더 욕심내다가 또는 더 정을 퍼붓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애가 꿈에 나타나지 않으면 매일 자는 잠이 슬퍼질 텐데, 나는 슬프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덜 슬퍼지기 위한 대비책은 오늘도 우리가 꿈에서 만났다는 안도만 침대에 남겨 둔 채 가쁘게 시작하는 하루였다. 난 곧장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이따위 말들을 덧붙이고 싶어졌다. 우리 내일도 봐. 오늘도 일찍 자 볼게. 넌 나한테 정말 고마워해야 해. 난 원래 새벽 내내 일하고, 아침 일찍 잠들었다가 오후부터 또 일해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너 때문에 내 새벽이 너와의 시간으로 바뀌었어. 고맙겠지? 고마울 거야. 내가 너라면 고마워서 화 따위는 나지도 않을 거야. 그렇지만 화를 내도 좋고, 더 날카로워져도 좋으니까 내일도 봐. 내일도 아침부터 부지런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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