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낭비
(1).
잠에서 깨자마자 하루가 끝나길 바랐다. 아무 일 없고, 일어나도 딱히 해야 할 게 없을 때마다 남은 하루가 아득하기만 하다. 업무는 지난주에 끝났고, 출근 전까지 쓰겠다며 구상해 둔 소설 쓰기 외엔 오늘 할 일은 없다. 이럴 줄 알고, 지난 주말에 책 8권을 도서관에서 빌려왔지만, 유달리 오늘은 길겠다는 예감이 불길하게 찾아왔다.
오늘은 그런 하루였다.
(2).
평소 일 없을 때와 똑같은 하루였다. 책 읽고, 운동하고, 소설 쓰고, 산책하고, 온라인 독서 모임 좀 하고. 오후쯤 받기 싫은 전화를 실수로 받긴 했으나 금세 마무리됐으므로 이전이나 이후나 평소와 다른 점이라곤 없는 하루였다.
차이점이라곤 그 사이로 생기는 틈마다 들이닥치는 잡념뿐이었다. 책 읽다가 문득 덮으면 ‘왜 책을 읽고 있지?’ 하고 내가 나에게 묻질 않나. 운동하러 나가는 길에 ‘왜 운동은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이런 질문이 속에서 빗발치질 않나. 심지어 산책하며 틈틈이 소설을 쓰다가 대놓고 메모장에 ‘난 왜 이걸 쓰고 싶지?’라는 말을 남겼다.
차라리 과로하고 싶다.
쉴 틈 없이 일하다 보면 어떤 생각이든 오래 머무르지 않아서 좋다. 가만히 앉아 있을 시간 없이 일만 하고 싶다. 왜 업무를 일찍 마쳤을까. 지난주의 나는 치사하다. 아무리 잡념에 시달리기 싫어도 그렇지, 미리 일을 다 해치우면 이번 주를 대체 어떻게 견디라고.
차라리 막 달리고 싶다.
달릴 때도 잡념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쫓아왔지만, 그래도 체력을 다 소진하고 나면 낮잠이라도 잘 수 있으므로. 오늘 할당량으로 받은 체력을 다 쓸 마음으로 밖에 나왔지만, 골목 돌아 나오자마자 습한 기운과 어깨 나란히 한 뙤약볕에 지고 만다. 주차장에 쪼그려 앉아서 쏜살같은 잡념과 느려터진 시간을 욕하지만, 욱했는지 시간과 잡념은 더욱 집요하게 나를 괴롭힌다.
차라리.
실은 ‘차라리’를 지워야 한다.
(3).
안 그래도 하루는 느리게 나를 맴도는데, 여름이라 해까지 길다. 저 해는 언제쯤 저물까. 얼른 밤이 와야 이 느려터진 하루와 작별할 텐데.
이렇듯 빠듯한 일정이 없는 날마다 하루에 진다. 거북이는 항상 토끼를 이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종일 했다. 최대한 빠르게 달려야만 뒤쫓아오는 잡념에 삼켜지지 않지만, 잡념과 하루는 거북이처럼 느리더라도 반드시 내게 도달한다.
다행히 이 글을 끄적이는 지금은 밤, 겨우 하루를 다 썼다. 이 글마저 다 쓰고 나면 곧장 자러 갈 생각이다. 그러고 나면 내일. 내일이 지나면 업무가 재개된다. 나태한 하루를 딱 한 번만 더 견디면 된다는 뜻이다. 내일은 생각에 빠져들기 싫어서 며칠간 무턱대고 쓴 단편소설을 마저 쓰고, 출근 준비도 하고, 운동하고, 책 한 권 다 읽고, 그러고도 또 뭘 할까. 뭘 해야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는 시간을 물리칠 수 있을까.
생각 많은 나보다 더 우스운 것은 이 글이다. 머릿속이 넘칠수록 글은 짧아진다. 이로써 내 머릿속이 하등 쓸모없는 잡념만 모았다는 걸 다시금 확신하지만, 확신해도 소용없다. 언제나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