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수영인의 재도전기
(1).
아침에 눈 뜨자마자 수영장으로 달려갔다. 여덟 자리밖에 남지 않은 잔여석 중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안내 데스크로 직진하고, 회원증 내밀자마자 오전 중급반을 원하냐는 말이 들렸다. 고개 끄덕이면서도 초급반 잔여석을 확인하고 왔어야 했다는 후회가 동시에 고개 들었다.
그러나 내 진도는 중급반이다.
초급반일 수 없다.
지난 반년간 지겹도록 중급반 망령 신세이지 않았는가.
결국, 올해도 오전 중급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강의 안내 및 수영장 규칙을 의미 없이 읽다가, 안내 데스크 직원분께 조심스레 물었다.
“강사님은 그때 그대로인가요?”
“아직 강사진은 확정 안 되었어요. 첫 강습 때 오시면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내 생각엔 첫 강습 날에야 내 마음도 확실해질 것 같았다. 지난 1년을 함께 보낸 강사님이 그리운지 아니면 오래오래 중급반 레인을 지키고도 또 중급반인 내가 부끄러운지. 두 감정 중 어떤 게 더 클지를 가늠하며 수영장 밖으로 나왔다. 괜히 등록했다는 후회와 들뜨느라 가쁜 숨이 공존하는 오전이었다.
(2).
작년 여름부터 올해 봄까지. 약 일 년간 수영을 배웠다. 단순히 배웠다고만 해도 될까. 작년을 한 단어로 줄이자면, 수영이었다. 말 그대로 수영에 미쳐 살았다. 수영이 다이어트에 좋다는 영업을 시작점 삼아, 다이어트와 상관없이 헤엄치는 순간에 홀려서 수영장을 제2의 집으로 삼기 시작했다. 눈 뜨자마자 수영장 가고, 연달아 수영 강습 들은 다음 점심 먹고 또 수영하러 갔다. 주말이든 공휴일이든 심지어 크리스마스이브든 크리스마스든 수영장에 갔다.
그뿐인가. 수영복이 셀 수 없어지면서 수영복 보관함을 선물 받았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수영복을 모았다. 졸린. 나이키. 펑키타. 움파. 센티. 후그. 위니스윔. 풀타임. 배럴. 브랜드 가리지 않고, 취향이면 사들였다. 지금도 내 수영복 보관함에는 백 벌 넘는 수영복이 숨어 있다.
기분 따라 수영복을 입었다. 기분이 좋으면 형광 계열 수영복. 기분이 별로면 패턴이 화려하나 색감은 어두운 수영복. 날씨에 따라 입는 수영복도 달랐다. 첫눈 내리는 날엔 흰색 수영복을 입었고, 화창할 때는 아끼는 수영복을 입었으며, 비 오는 날엔 한 톤 다운된 형광 하늘 수영복을 입었다. 심지어 핼러윈에 맞추어서 핼러윈 특집 수모를 구매하고, 핼러윈에 어울리는 패턴으로 인쇄된 수영복을 입었다. 더 나아가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에는 각각 다른, 그러나 크리스마스를 의미하는 패턴 수영복과 수모를 챙겨서 수영장으로 달렸다. 실력은 늘지 않았지만, 수영복 취향은 나날이 늘어서 어떤 수영복이 나와 어울리는지를 속속들이 파악해 냈다.
“제발 그 돈으로 옷을 사!”
당시 이 말을 질리도록 들었다. 수영하는 시간이 늘수록 체중이 미친 듯이 감량되기 시작했는데, 정작 육지 옷은 사지 않았다. 그러느라 회사 이사님께는 ‘너도 뭐 H.O.T 팬이냐? 왜 이렇게 캔디 시절 옷차림이야?’ 소리를 들었고, 실장님께선 ‘살 빠지시는 걸 잘 못 느끼시나요? 옷이 너무 커지셨는데….’ 이런 우려도 챙겨 주셨지만, 굴하지 않았다. 육지 옷엔 돈 한 푼 안 썼다. 그 돈으로 또 수영복을 사야 했으므로.
그러나 돈으로 수영복은 살 수 있어도 수영 실력은 살 수 없었다. 수영복은 점차 늘었지만, 수영 다닌 지 삼 개월 만에 내 실력은 멈췄다. 이후 반년 넘도록 같은 진도를 헤엄쳤다.
(3).
평영이었다.
평영의 벽에 부딪혔다.
초보 수영인 중 대부분을 수영장에서 내쫓는 녀석이 있는데, 그 악명 높은 녀석의 이름은 평영이다. 물속에서 숨 쉬는 법과 자유형을 배우고 나면 평영과 만난다. 만난 건 반갑다. 그런데 반가워도 그렇지, 평영 이 녀석은 나를 약 7개월간 절대 놔주지 않았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렇다. 7개월간 평영만 배웠는데, 단 한 뼘도 나아갈 수 없었다.
강사님께 배운 대로 다리를 오므렸다가 쫙 폈지만, 물결은 잔잔했다. 제자리에서 내 다리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하도 진도가 나가질 않으니, 팔 힘으로라도 나아가길 바랐던 강사님께서는 다급히 평영 팔동작을 가르쳐 주었으나. 마찬가지였다. 팔 힘으로 억지로 몇 뼘 나아가도 평영에 발이 묶였다.
몇 달쯤 지났을까.
내가 묻고 싶은 말을 강사님께서 내게 쏟아냈다.
“아니, 허벅지 힘 너무 좋거든요? 다리 전체 힘도 너무 좋아요. 자유형 할 때 보면 수영을 할 줄 알아. 근데 왜 이렇게 평영이 안 되시는 거예요? 코어 근육이 없다기엔 팔동작은 또 잘하시잖아.”
인바디 검사만 해도 안다. 아니, 어떤 검사를 하지 않아도 안다. 나는 상체보다 하체 힘이 월등히 좋다. 부모님 모두 하체가 튼실했고, 그들을 반반 닮은 나는 어떤 운동을 배우든 하체 힘으로 진도를 밀어붙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평영은 그런 내게 밀려나지 않았다. 진짜, 꿈쩍도 안 했다.
강사님도 답답하고, 나도 답답한 나날이 이어졌다. 뭘 하든 기록하는 걸 좋아하고, 다이어리 쓰는 게 습관인 나는 수영 다이어리와 수영 기록장 역시 1년간 썼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수영 기록이 평영을 저주하고, 욕하고, 탓하는 말밖에 없다는 걸 알아챘다. 반년 넘도록 진도는 계속해서 평영 발 동작이니 당연했다.
내 자존심과 성격상 이쯤에서 ‘그럼에도 했고, 결국엔 평영으로 25m를 헤엄쳤다.’라는 전개가 이어져야 했으나. 내 인생 최초로 자존심을 굽혔다. 평영의 승리를 축하하며, 곧장 수영을 관뒀다. 그 대신 수영장 옆 도서관을 미친 사람처럼 들락날락하기를 약 넉 달째.
수영장이 리모델링을 마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4).
수영과 절교한 지 넉 달째. 그 사이 수영장은 운영 중단까지 강행하며 파격적인 리모델링을 마쳤다. 수영할 때마다 입 꽉 다물게 했던, 그 더러운 수영장을 다 씻어내기도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건 이틀 전이었고, 오늘을 기준으로 다음 주부터 수영 강습이 재개된다는 정보까지 이어졌다.
아.
이건 수영을 재개하라는 계시일지도 몰라.
나는 정말이지, 온갖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산다. 이를테면 마침, 내 사주에 물이 없다는 걸 알았는데, 수영이 다이어트에 좋다는 말이 이어지면 수영을 배우라는 계시로 부풀린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살 생각도 없었던 수영복이 내 사이즈만 남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건 뭐 나한테 창고에서 구출해 달라는 구조 신호인 거지.’ 이런 식으로 과하게 해석하여 수영복을 결제한다. 그런 나에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리모델링 싹 마치고, 새롭게 수강생을 모집하는 수영장’은 너무나도 큰 의미로 다가왔다.
문제는 이미 모집 기간이 지나간 상태였다. 지난주를 끝으로 모집 기간이 끝났다는 소식도 전해져서 수영을 잠시 추억하다가 말라는 뜻으로 슬그머니 의미를 줄이려 했건만. 잠결에 들어간 홈페이지에서 하필 내가 다니던 오전 중급반 수강생이 8명 덜 모였고, 당장 내일부터 8명 더 모으겠다는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이 공지가 나한테 보내는 초대장이 아니면 뭔데.
그 생각으로 아침 일찍 눈 뜨자마자 수영장으로 뛰어갔고, 오전 중급반에 내 이름 떡하니 올렸건만. 평영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또 얼마나 오래 중급반에 머무를까. 이번에도 평영이 나를 이길까. 나는 또 한 뼘조차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우스꽝스러운 발길질만 평영인 양 해 대고 있을까.
그러나 매번 의미를 쏟고 사는 내게 새로운 의미가 도전 과제로 쏟아졌다.
(5).
수영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뭘 시작하든 제대로 시작해야 하는 나는 무작정 수영복 두 개를 샀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수영복 중독은 예견된 일일지도 모른다…)
하나는 당시 수영복 매장에서 내 사이즈로 알려 준 34 사이즈 수영복이었다. 이후 강습 시간마다 교복으로 의미 부여하며 입고 다녔던 수영복이었고, 오늘 오랜만에 꺼내 보니 잔뜩 해져 있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남은 하나다. 총알도 남은 한 발이 중요하듯이. 남은 하나는 당시 수영인 사이에서 인기 많았던 수영복이었다. 졸린이라는 수영복 브랜드에서 팔았던 수영복으로 오픈된 지 30초 만에 동난 수영복이었다. 그때 난 그 수영복을 목표로 삼겠다며 무려 26 사이즈로 수영복 주문에 성공했다. 어떤 목표였느냐면.
이 수영복 맞을 때까지 살 뺀다.
이후로도 살 빼면 입겠답시고 26 사이즈 수영복을 함께 모으기 시작했다. 가장 취향인 수영복은 26 사이즈로 구매했고, 덜 취향인 수영복만 내 몸에 맞게 구매했다. 모으다 보면 돈 아까워서라도 빼겠지. 뭐 그런 마음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영복은 나이키 수영복 중 등 뒤로 끈을 묶고, 민트색인 수영복인데 이 수영복 역시 26 사이즈로 구매했고,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인 펑키타 수영복 역시 26 사이즈로만 구매했다.)
그러나 정작 26 사이즈를 입기도 전에 수영을 관뒀다. 마지막으로 평영 연습하러 수영장에 갔던 날 입었던 수영복은 28 사이즈였던 걸로 기억한다.
수영을 재등록하자마자 집에 돌아온 나는 수영복 보관함을 열었다. 그러고는 포장조차 뜯지 않고, 고이 모셔 두기만 했던 26 사이즈 수영복을 꺼냈다. 설마 이게 맞을까. 반신반의하며 왼쪽 다리부터 넣었다. 쑥 들어가졌다. 남은 다리도 넣었다. 잘 들어간다. 그대로 수영복을 올려봤다. 불편함이라곤 없이 끝까지 올라갔다. 34 사이즈가 꽉 끼어서 34 사이즈와 36 사이즈를 번갈아 입었던 나였는데, 이젠 26 사이즈 수영복이 헐렁하다.
즉, 나는 수영을 시작하며 세웠던 목표를 이룬 셈이다.
(6).
그렇다면 이제 목표를 새로 세워야 한다. 난 목표 없이는 못 산다. 해야 할 일과 목표를 정해 두지 않으면 과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런 나와 수영에 딱 어울리는 목표를 새로 세워야만 했다. 고민할 필요 없었다. 나를 수영장에서 내쫓은 녀석이 있지 않은가.
수영을 다시 시작한 이상 평영을 물리쳐야겠다.
평영으로 25m를 전진해야겠다.
초보 수영인을 내쫓는 평영의 벽을 때려 부수어야겠다.
몇 달 만이라 자유형이 가능할는지도 모르겠다만. 어차피 자유형은 어려웠던 적 없으니 어려워져도 환영이다. 다시 해내면 그만이다. 중요한 건 성공해 본 적 없고, 나를 오래오래 좌절하게 했던 평영이다. 수영복 백 벌 들고 가도 이길 수 없었던 평영을 내년 이맘때까지는 마스터하고 말 테다.
그렇게 평영과 나의 리벤지 매치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