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게 된 기억 속을 잠시 헤엄치고
월요일
수영을 쨌다. 분명 아홉 시에 눈 떴지만, 십 분만 더 잔다는 게 눈 뜨니 열한 시였다. 수영 강습이 마무리될 시간에 맞추어서 일어난 몸이 오래오래 우스웠다. 게다가 침대 옆에는 수영 가방이 놓여 있었기에 더더욱 오래. 최대한 빨리 수영장에 가라며 꼼꼼히 준비물을 챙겨 둔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내가 배신할 줄이야.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에게 배신당할 줄도 모른 채 수영 가방을 챙겼으나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를 위해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질 못 한다.
그래도 어제의 나를 조금이나마 기억해 주고 싶었다. 어쩌면 이건 자기변명 또는 보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도 나서서 나를 변명해 주고, 보호해 줘야만 하지 않나. 이렇게 한 번 더 나를 두꺼운 포장지로 감싼다.
포장 마친 김에 나를 더 대놓고 꾸미기 시작한다. 일단 나쁜 마음을 기록하라는 의미로 출판된 책 챙겨서 카페에 가는 거다. 이후 기록할 때만큼은 가장 비싸지고 싶어서 큰 마음먹고 구매한 연필 꺼낸다. 무려 하나에 사천백 원짜리다. 그 연필로 나쁜 마음을 기록하려는데, 단 한 줄도 적지 못 했다. 그저 내 이름만 끊임없이 썼다. 내 이름 뜻이 나쁜 마음이라는 듯이.
결국, 나는 나를 꾸미는 데에도 실패했다.
고작 두 번째 강습 만에 수영장에서 도망친 나는 뭘까. 그러고 보면 지금 하는 일 말고는 뭘 하든 쉽게 도망쳤다. 때로는 도망치는 게 가장 큰 승리라고도 생각했다. 이길 수 없는 주제에 그 자리를 지켜봤자 죽음 외엔 나를 기다리는 게 없어 보였다. 게다가 자존심도 상했다. 지는 것도 분해 죽겠는데, 지는 나를 잠자코 지켜보기는 싫었다. 그 탓에 사람을 만나다가도 감정이 조금이라도 앞서는 것 같으면 헤어졌고, 취미로 진득이 뭘 하다가도 실패할 것 같으면 곧바로 흥미부터 버렸다.
내내 실패한 인생으로 여기면서도 정작 인생과 비교하면 한없이 작은 실패들이 두려웠고, 두렵다. 실은 아홉 시에 눈 뜨자마자 처참했던 평영 실력이 떠올랐고, 구태여 포근한 잠에서 벗어나, 수영장으로 가야 하는지를 자문자답했다. 대답은 더 자는 거였다. 수영장에서 도망치면 실패를 실패한 것이니, 마음이 그나마 덜 괴로울 것 같았다.
그럴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자꾸 수영장이 머릿속을 차지하나 싶더니 이젠 그냥 내 뇌가 수영장 같다. 이토록 수영장만 생각하고 후회할 거라면 화요일에 자유 수영이라도 갈까. 고민하면서도 화요일 약속을 잡았다. 실패의 실패의 실패다.
그러나 이 글은 실패를 성공하는 마음에서 쓴다. 월요일과 화요일을 묶고, 수요일 아침에 이 글을 마무리할 생각이다. 이렇게 쓴 이상 수요일 아침 강습에선 도망치지 못할 나를 안다. 자존심만 더럽게 세서 이 글 마지막 문장은 수영하러 간다는 한 줄로 채우고 싶을 나를 평생 알고 지냈다.
화요일
게다가 우리 엄마는 치사하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우리 아빠도 비슷하게 치사하다. 월요일에 수영장을 포기한 이후 조금은 우울에 가라앉아 살았는데, 다짜고짜 그런 내게 엄마가 팔짱을 껴 왔다.
“십 년짜리 생일 선물 줄게.”
이후 아빠가 모시러 가겠다며 나를 차에 태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이후의 시간이 다 너무 소중해서 한 문장도 적고 싶지 않다. 이 기억 전부 나만 가지고 싶고, 나 말고는 아무도 이 기억을 쓰다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나쁜 마음으로 단 한 줄로 치사한 엄마와 아빠를 기록하자면, 이후 나는 오려면 한참 남은 생일 선물을 십 년어치나 한꺼번에 받았다. 너무 소중해서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나답게 그 선물을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고이 모셔 뒀다. 아마 저 포장지를 뜯으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주아주 오랫동안 포장조차 뜯지 않은 선물을 보며 치사한 엄마와 아빠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느라 선물 받은 기억이 닳지는 않을지 걱정하기도 할 거다.
하여간 나는 뭘 선물 받으면 제때 쓰지 못한다. 제때 쓰지 못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아예 뜯어보질 않는다. 그 마음을 계속 새것으로 두고 싶어서 오래오래 선물 상자 그대로를 쳐다보기만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또 슬퍼졌을 때 서둘러 선물 상자를 푼다. 새것 그대로 뒀던 마음을 꺼내서라도 슬픔에서 도망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 마음은 삼 등분으로 잘려 있다. 내가 오래오래 슬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엄마와 아빠 덕분에 한동안 슬프지 않을 것도 같은 확신. 선물 상자 저대로 두고 싶지만, 십 년 꽉 채워서 선물해 준 부모님을 생각하면 선물 상자 안을 확인해 보고도 싶은 호기심.
그러므로 내게 은근슬쩍 제안하는 거다. 수요일에 수영 다녀와서 선물 상자를 열어 보자고. 수영장 락스 물로 깨끗이 씻긴 몸은 어제보다는 새것일 테니, 내 마음도 선물해 준 부모님 마음도 다 계속 새것이지 않겠느냐고. 엄청난 비약과 무논리로 둘러 감은 제안이지만, 나는 혹한다. 왠지 그럴싸한 제안 같아서 내일 수영 강습을 꼭 가고 싶다. 하여간 나는 나를 제일 잘 알고, 하여간 나는 좀 멍청한 구석이 있어서 꼬시기 참 쉬운 것도 같다.
너무 소중해서 나만 간직하고 싶었지만, 언젠가는 이 순간이 낡아져서 드문드문 기억할, 미래의 나를 위해 남겨 두는 화요일 일부.
미래의 나에게.
아빠랑 엄마가 나한테 한참 남은 생일 선물을 줬어. 그래서 나도 아빠한테 선물을 사 줬지. 요즘 아빠가 계속 전자 담배가 어떤지 묻는 거야. 그러면서도 선뜻 사지 않길래 바로 알아챘어. 나 저 마음 알거든. 내 돈으로 사기는 싫지만, 갖고는 싶은. 이럴 땐 타인이 필요하잖아? 고민하지 않고, 아빠에게 전자 담배 기계를 사 줬어. 내일 배송 온대. 그러니까 난 내일 수영 강습에 꼭 다녀와야 해. 왜냐면, 전자 담배를 피워 본 적 없는 아빠는 분명 맛대가리 없는 담배를 기계에 꽂을 거야. 그 사태를 막으려면, 수영 다녀오는 길에 내가 직접 편의점에 가서 아빠의 첫 전자 담배를 사야겠지?
이렇듯 2024년 여름, 어떤 화요일에 나는 사랑은 주거니 받거니 해야 더 온전해진다는 걸 배우고 있어. 미래의 나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월요일보다는 덜 우울해. 그리고 수요일에도, 미래에도 덜 우울하고 싶으니까 계속 나를 설득하든 달래든 하고 있어. 수영 가자고. 뭐라도 하면서 살자고. 이런 날이야. 절대 낡아져선 안 되는 날이야. 드문드문 기억해서도 안 되고, 전부 기억해야 하는 날이야. 그래서 미래의 나에게 이날 일부를 들려주는 건데, 부디 미래의 내가 이 글을 읽고 ‘그래, 알아. 그날 전자 담배 기계를 선물 받은 아빠가 이렇게 말했었잖아.’하고 퉁명하게 그다음 날을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다.
절대 낡아지게 두지 마
이번 화요일은 계속 새것이어야 해.
수요일
오전 9시 31분!
수영하러 간다.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