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오후

by 희온

너무 일찍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지는 않나요


유난히 애매한 오후가 있습니다.


손은 무언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데,

마음은 자꾸만 궤도를 이탈해 엉뚱한 곳을 서성이는 시간.


하루 종일 무언가를 하긴 했으나

손에 잡히는 성과는 없고,

거울 속의 나는 조금 지쳐 보입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불쑥,

질문 하나가 고개를 듭니다.


“나, 지금 제대로 된 길로 가고 있는 걸까?”


딱히 불행한 것도,

그렇다고 커다란 실패를 겪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서늘할 뿐이죠.


내가 쏟아붓는 이 연습과 시도들이 훗날 어떤 쓸모가 있을지,

혹시 나만 이 자리에서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닌지.

이런 의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오후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나는 지금 스스로를 심판하는 질문을 너무 일찍 던지고 있었다는 것을요.



반드시 무언가를 증명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나로서 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과가 없으면 의미도 없는 것 같고,

속도가 느리면 틀린 길을 가는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납니다.

확신이 없으니 지금 당장 멈춰야 할 것만 같은 공포가 밀려오기도 하죠.


그럴 때 저는 질문의 방향을 살짝 틀어보기로 했습니다.


“이 시간을 통과한 뒤, 나는 조금 더 정돈되었는가?”


대단한 성취는 없어도 괜찮습니다.

완벽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기꺼이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꾹꾹 눌러쓰는 동안,

요동치던 마음은 조금 더 평온해졌고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나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닐까요.


우리는 자주 ‘잘 살고 있는지’를 자문하지만,

사실 우리 마음이 정말로 듣고 싶었던 대답은 정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괜찮다.”

“아직 정답을 모르는 상태도 너의 일부다.”

“이 시간을 굳이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된다.”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는 오후는 실패의 신호가 아닙니다.

그저 잠시 속도를 늦추고 숨을 고르라는 다정한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 오후를 너무 빨리 통과하려 애쓰지 마세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서,

지금의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은 이미 충분한 의미를 가집니다.


오늘도 그런 오후를 보내고 있다면,

억지로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그 무거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 것.

오늘 하루는 바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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