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e Kim Jul 27. 2018

여름의 맛

여름은 시원한 수박과 달큼한 복숭아 맛으로 가득 찬다

지난달 등록했던 모나츠 카르테가 벌써 만료됐다. 여기 온 지 한 달. 새삼스레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 기분이라 서둘러 가는 시간에게 잠시 서운해진다.


선선하니 좋던 날씨가 점점 달아오르더니 이제는 퇴근길 트램이 찜통이 되어버린 수준이다. 에어컨이 없는 집에서 잠을 청하려니 종종 뒤척인다. 그러면서도 창문을 열고 자면 목이 잠겨버리는 게 신기해.


더운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피해 오틸리에는 새로 생긴 여름 별장에 자주 가있는다. 8월부터 아마 그곳에 자신은 조금 더 많이 있을 것이라고. 정원이 크고 돌봐야 할 꽃과 나무가 많아 바빠 보인다.

굳이 다른 식물을 심고 싶지 않다는 Ottilie는 자연스러운 정원의 모습을 더 좋아한다.

말로만 듣던 그녀의 집에 화요일 저녁 같이 다녀왔다. 그동안 나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해 미안하기도 하고 아쉬웠다고. 물론 함께 일어나 이런저런 짧은 대화를 나누는 아침과 밤이 좋긴 하지만, 지금은 작센하우젠의 좋은 집을 혼자 온전히 쓸 수 있어 이 또한 전혀 나쁘지 않다.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차로 15분 정도 달리면 랑엔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오틸리에의 새로운 집의 주인은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오틸리에는 그의 딸과 정말 우연히도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원을 돌봐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고 바로 그 누군가가 오틸리에가 되었지. 운명이자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집에 도착해 정원을 둘러보았다. 색색깔의 장미꽃, 커다랗고 듬직한 앵두나무, 무화과나무, 자두나무, 사과나무, 복숭아나무까지. 더운 요즘이라 아이들이 많이 목말라 보이지만 다들 꿋꿋이 자라난다. 나무에 달려있던 복숭아를 오틸리에가 내게 하나 건넸다. 솜털이 송송 돋아있는 울퉁불퉁 작은 복숭아. 한 입 깨무니 달짝지근한 물이 입안을 채운다.


아, 이게 여름의 맛이지.


샐러드에 넣은 민트는 생각보다 큰 존재감을 보였다.

해가 늘어지니 저녁을 먹자. 싱크대에 물을 가득 채워 양배추와 민트를 한가득 씻어내고, 오이, 양파, 토마토, 샐러리를 곁들여 여름 샐러드를 담아낸다. 간단하지만 맛있는 여름의 맛. 샐러드와 함께 할 바게트는 오븐에 살짝 구워줘요. 메인으로는 흰 살 생선. 밀가루를 살짝 묻히고 레몬 타임과 후추를 얹어 올리브유에 살짝 튀겨냈다.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예뻐 카메라를 꺼내 드는 못된 버릇이 또 나와버렸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자연스레 생겨나는 이 모든 것들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기분이다. 그러면서도 사진으로 남기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까 두려워 호다닥 셔터를 누르고 그러지 않았던 척을 한다.

레몬 타임과 후추를 얹어 올리브유에 살짝 튀긴 흰살 생선.

대화 중간중간의 적막이 어색하지 않은 저녁이었다. 음식이 좋았고, 날씨가 좋았고, 눈 앞의 정원이 좋았고, 내 옆의 아름다운 존재가 좋았다.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던 밤이었다.


계절의 맛


내게 여름은 시원한 수박과 달큼한 복숭아의 맛이다. 오틸리에는 여름은 수박과 레몬 타르트의 맛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그리고 감정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해줬다.


맛도 맛이지만, 도드라지는 계절의 냄새 또한 강렬하다.


봄의 노란 개나리 냄새, 가을 아침 젖은 낙엽의 냄새, 겨울의 적막하고 고요한 언 땅의 냄새까지.


계절에 얽힌 기억들이 한데 뭉쳐 특유의 냄새를 만들어낸다. 사람마다 기억하는 감각의 종류와 정도 또한 사실은 죄다 다를 것이다. 오틸리에가 생각하는 여름 수박의 맛과 내가 생각하는 여름 수박의 맛이 다른 것처럼.


리즐링 와인을 곁들이며 밤 늦게까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촛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결국 인간은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박한 시골집에서 우주 만물을 통달하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달큰한 여름 사과는 벌레들에게도 인기 만점이다.

선선한 여름 별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에 정원이 선물해준 푸른빛 자두를 쪼개어 먹었다. 신맛이 감도는 과육에 한층 기분이 좋아진다.


여름의 맛이 한층 짙어진다. 곧 8월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치사할 만큼 쉬운 기록에서 벗어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