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얼 Oct 23. 2021

흐린 기억 속의 그대

그즈음 나는 많은 것을 잊었다. 기억해야 할 것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기억해야 하는 것의 반대급부로 그 몇 배의 양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얼굴, 많은 얼굴을 잊었다. 내 앞에 서있던 수많은 얼굴들을 하나씩 잊어갔다. 하나둘씩 떠올랐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다 어느 날은 여러 얼굴이 한데 뭉쳐 지워져 나갔다. 


머릿속엔 얼굴 없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아무 표정도 없이 그저 내 앞을 가득 가로막고 있었다.  얼굴 없는 얼굴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서서 무어라 각자의 말로 떠들었다. 


나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보고, 무어라 하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계속 쫓았다. 그렇게 나는 계속 흐릿한 눈으로 앞을 보지 못하고 멍하니 멈춰 있었다.


 생각이 흐릿한 동안 나는 질문이 많아졌다. 흡사 대 여섯 살 어린아이처럼 수 없는 질문을 해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허공에 막무가내로 내던져진 질문들이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 수 없었다.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에 발버둥 치며 끝도 없이 소리를 쳤다. 

 대답 없는 질문들 속에 마침내 알 수 없는 작은 대답을 듣고서야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기 시작했다. 


그 대답이 정답이어서가 아니라 돌아오는 대답 소리가 이 앞이 낭떠러지가 아니라고, 내 앞에 돌산 같은 바위가 막고 선 벽이 아니라고, 그렇게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메아리처럼 돌아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내 앞을 조금씩 밝혀줬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서 흐린 눈을 하고서도 고개를 들어 앞을 볼 수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고개를 들고 앞으로 걸어도 괜찮겠다 생각했다. 적어도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바위에 부딪쳐 깨어지지 않을 것이란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았지만 죽으려면 죽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반복해서 질문했다.


살고 싶냐고,

진짜 이렇게 살고 싶냐고


나는 어떻게든 살고 싶다고 했다. 

그 대답으로 나는 지금까지 왔다.









이전 02화 경계에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