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임시 보호자
시간 빌게이츠가 되고 나서 한 동안은 원 없이 책을 봤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읽는 것- 그 자체를 해보고 싶었다.
책을 영양가 있게 읽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면, 아닌 것 같다.
가끔 이해가 되지 않는 어려운 책, 흥미가 떨어진 책은 활자만 읽는 경우도 많다.
고백하자면, 나는 책이 머리로 들어와 흡수된다는 느낌에 감탄하며 희열을 느끼는 것보다
읽는 행위 자체가 좋아서 책을 보는 것 같다. 집중하기 위해 강제로라도 무엇인가와 단절된 상황은 늘 필요하니까.
그뿐인가. 좋은 문장에 밑줄 칠 수 있는 연필이나 색연필, 기억하고 싶은 페이지에 붙일 수 있는 인덱스, 목의 피로를 덜어줄 독서대... 읽을 책은 한 권인데, 그 한 권의 책을 읽기 위해 필요한 실용적이면서도 귀엽고 소장가치 있는 독서템을 사는 것도 취미다.
아무튼. 이유가 어떻든 나는 책을 정말 좋아한다.
외출했는데 그곳에 서점이 있으면 볼 일이 없더라도 순찰하듯 쓰-윽 한번 돌아봐주고 오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책을 사는 건 소비가 아니다. 마음의 양식을 차곡차곡 저장하는 것이니까- 투자 개념으로 본다면 마이너스가 될 수가 없는 소비가 책을 통해 이뤄지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책이 많이 쌓여있고 그 많은 책은 다 읽지 못했다. 언젠가 읽긴 하겠지만 그날이 언제인지는 나도 장담할 수는 없다. 아무도 안 시킨 출판계의 빛과 소금을 자처하며 병렬 독서라는 무한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결심을 했다.
'사기만 하고 안 읽은 책들, 앞으로도 안 읽을 것 같은 책들 다 팔아버리자'
어차피 손 안 간 책들은 앞으로도 손이 안 갈 거야. 미련 없이 비우자.
가지고 있으면 뭐 해. 더 읽고 싶은 사람한테 가는 게 맞지.
책장 비우고 소소하게 용돈을 벌어보자.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책을 골라내보니 꽤 된다.
'내돈내산 책을 굳이 스쳐 지나가듯 임시 보호를 하고 중고로 판다' 라...
갑자기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다. (손해 맞음)
... 내가 아무리 돈이 급해도 그렇지, 책을 한 번도 안 보고 남 줄 생각을 하다니.
어디서부터 삐딱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나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책을 사지 않고 임시 보호하고 있는 책만 읽기 시작해도 올해가 뭐야, 내년까지도 읽을 책이 없어서 걱정인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제 책 임시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끝내고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이 많은 책들을 굽어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