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가 없긴 한데, 그래도 느리게 가기
오늘은 역대급 뺑뺑이를 돌고도 기분이 상쾌하다.
접영 자세가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어제는 잠이 들기 위해 누웠는데도 머릿속은 내일 수업 때 접영을 어떻게 할지, 어떤 동작에 집중해 볼지 온통 물 속이었다. 그렇게 꽤 오래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못하면 못할수록 마음은 조급해져서 가끔은 수업을 회피하고 싶기도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기라도 해야 하는데 회피형이라니, 최악이다.
지상에서 물속에서 연습했던 모든 것들은 본격적으로 접영 시-작!과 동시에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다 사라지고 없어졌다. 하던 대로 엉망인 영법으로 허우적거리며 선생님한테 한 소리도 좀 듣다 보면 50분 꽉 찬 수업이 끝났다. 이런 날들이 계속되니 접영만 했다 하면 자신감은 끝도 없이 떨어졌다.
그래도 어떡해. 결국은 할 줄 알아야 끝나는 게임인데-. 적어도 접영 할 줄은 알아요~가 돼야 교정반을 가든 연수반을 가든 다음 스텝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이쯤 했음 됐다 하고 다시 기초반으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살면서 이런 상황은 수도 없이 많이 마주했다. 나 대신 누가 해줬으면 좋겠는 발표, 불편한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미팅 자리, 안 미안하지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사정을 읍소해야 하는 일들... 늘 그럴 때마다 '끝은 있다. 결국 다 내가 해낼 것이고, 내일 이 시간이면 모든 것이 끝나있다' 이렇게 마음을 잡았다. 끝이라는 것은 분명히 있고, 나는 속으로는 울지라도 결국 그 일을 천천히 지나올 것이라는 믿음이 합쳐지면 그럭저럭 또 할 만하다.
그런데 이런 마인드가 수영에도 해당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지만 어찌 됐든 기본적인 접영 폼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 기본적인 폼을 몸에 담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여지없이 발전 없는 접영에 자신감 없이 돌고 있을 때였다.
"회원님, 제발 천천히 해요. 천천히. 지금 너무 빨리 하려고만 하니까 자세도 안 나오고 힘은 힘대로 들어서 다시 자세를 못 잡는 거예요. 천천히 가도 아무도 안 쫓아가요."
시작점에 돌아오니 선생님이 바로 한 말씀하셨다. 수영 잘한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빨리 가려는 것이 아닌데,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괜히 억울하기까지 했다.
"빨리 가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자세가 안 나온 채로 억지로 가려고 하니까 저도 제 속도에 휘말려서 컨트롤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천천히 가는 게 더 힘들지만 그걸 할 줄 알아야 빠르게도 갈 수 있어요. 순서가 천천히 갈 수 있게 되면 그다음이 빠르게-예요. 접영 잘하고 싶잖아요. 리듬감 생각하면서 가봐요. 잘할 수 있어요!"
정말 이번에는 내 몸의 감각이나 리듬감을 믿지 말고 머릿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자, 머리를 쓰자 속으로 되뇌며 벽을 차고 미끄러지듯 물속으로 들어갔다.
'지금 뜨면 안 돼. 깊게 웨이브를 들어가서 길게 글라이딩을 한 다음 서서히 뜬다.. 참아. 참아. 아직 아니야. 길~게! 그리고 하나 둘-'
천천히 하면 멀리 가지도 못하고 힘만 빠지진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오히려 호흡도 규칙적이고 동작 리듬감도 엉키지 않았다. 이제 조금 물속에서 접영으로 미끄러지듯 나가는 느낌을 알 것 같게 되자 심장이 뛴다. 이 느낌을 몇 번 더 느끼고 나면 진짜 접영을 잘하게 되지 않을까?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이게 얼마나 힘든지는 물속에 들어가면 안다. 빨리 떠서 물 잡고 호흡하러 나가고 싶은 성급한 욕망과 기다려야 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싸운다. 그리고 보통은 성급한 욕망이 항상 이긴다.
수영을 급하게 하는 건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님을 알고 있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으면 동작에 속도가 붙는다.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 심연을 들여다보면 빠른 속도로라도 못난 부분을 가리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숨겨지지도 않을 거면서.
여유가 없더라도, 없는 걸 만들어서라도 천천히 유영하는 연습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