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세탁기가 고장 났다. 빨래를 넣어 돌리는데 계속 삐삐 소리가 나서 가서 봤더니 멈춰 서있었다. 계기판?에는 LE라고 뜨는데 설명서대로 조치를 해봐도 얘가 돌아가지 않는다. 아마도 탈수 기능이 고장 난 것 같다. 할 수 없이 빨래를 꺼내 베란다로 가져가 손으로 헹궈 널었다. 안 돌아가는 세탁기 옆 쌓여있는 빨래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그냥 방치할 수 없어 빨래방을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천둥 치고 번개 치고 비가 장난 아니게 내렸다. 중간에 우박도 내린 것 같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밤새 딸아이가 끓여 먹은 불닭볶음면 설거지를 하고 우선 수건만 골라 장바구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예전에 친구가 빨래방에서 이불 빨면서 책을 읽으니 너무 좋았다는 후기를 들은 터라 나도 책을 한 권 챙겼다. 요즘 읽고 있는 그리스인 조르바! 참, 빨래 끝나고 담아 올 깨끗한 큰 장바구니도 하나 더 챙기고 말이다.
지나다니면서 봐왔던 빨래방에 갔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없어지만 세탁기 한 대가 이미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 빨래방 생기기 시작할 때 한두 번 이용해 본 적은 있었지만 오래되어 우선 어떻게 사용하는지 꼼꼼히 안내문을 읽어봤다. 표준 세탁은 4500원이었다. 그냥 표준 세탁으로 돌릴 거라 카드리더기에 표준코스를 선택하고 카드를 갖다 댔다. 그런데 인식이 안 됐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안 되었다. 처음부터 막히니 순간 멍했지만 안쪽에 보니 빨래방 카드를 구매하는 것이 따로 있었다. 만 원짜리 카드를 구매해서 세탁기 카드리더기에 대니 사용이 되었다. 휴우!
빨래방에 아무도 없으니 마음이 놓였다. 소파에 앉아 책을 꺼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조르바 책은 처음엔 좀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적응되니 술술 잘 읽혔다. 문장도 좋은 문장이 많아 밑줄도 그으면서 읽고 있다. 집중해서 읽고 있는데 누군가 들어왔다. 먼저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 빨래의 주인인가 보다. 세탁기에서 꺼내더니 빨래를 건조기에 넣고 사라진다. 다시 나 혼자만의 시간이 되었다. 책을 어느 정도 읽다가 세탁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살피러 세탁기에 다가가니 헹구어지고 있는 빨래에 거품이 아직도 너무 많은 것 같아 헹굼을 추가하려고 기다렸다.
집에서는 세제를 많이 넣지 않는 편이다. 섬유 유연제도 정말 10방울 정도 넣는다 생각하고 조금 넣는다. 하지만 빨래방은 자동으로 세제와 섬유 유연제가 넣어지다 보니 아무래도 세제 양이 많아 덜 헹구어질 것 같아 한 번 더 헹굼을 선택했다. 하지만 바보같이 먼저 카드로 결제를 하고 다시 헹굼을 선택했더니 다시 결재를 하라고 나왔다. 벽면에 붙어있는 사장님 핸드폰으로 사정을 이야기하려고 전화를 걸었더니 전화를 안 받으신다. 문자도 답도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결재를 하고 한 번 더 헹굼을 하였다.
다 헹구어진 빨래를 꺼내 건조기에 넣었다. 건조기 가격은 4분에 500원이고 30분 정도 건조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남은 잔액 3500원으로 총 28분 건조를 선택해서 건조기를 돌렸다. 그 사이 아까 건조기에 빨래 넣어 놓았던 그분이 빨래를 가지러 왔다. 아마도 집이 근처인가 보다. 그분은 넓은 탁자에서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빨래를 갰다. 책을 읽고 있던 나는 눈치도 좀 보이고 그래서 빨리 갔으면 했는데 어찌나 여유롭게 빨래를 개는지.
그래도 책은 재미있었다. 이 책을 빨리 읽어야 다른 책도 읽을 수 있기에 주말에 최대한 많이 읽어놓으려고 마음은 먹은 책이었다. 빨래방에서 읽은 구절이 지금 나에게도 전이되어 왔다. 조르바의 행복이 나의 행복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우리는 밤이 깊도록 화덕 옆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행복이란 얼마나 단순하고 소박한 것인지 다시금 느꼈다. 포도주 한 잔, 군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 단지 그뿐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행복이 있음을 느끼기 위해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
비록 세탁기가 망가져 빨래방에 왔지만 이 순간이 온전히 내 시간이 되었다. 사실 세탁기가 망가지니 주말 동안 쌓인 빨래를 보고 순간 멍해졌다. 이 많은 빨래를 어떡하나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손빨래를 하자니 양이 많아 우선 시험 삼아 수건만 가지고 빨래방에 왔는데 이곳에서 진심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건조기가 다 됐다고 신호를 줘서 집에서 가지고 온 새 장바구니를 탁자에 놓고 수건을 꺼냈다. 따뜻한 수건의 감촉이 새삼 달랐다. 집에서 말려 놓으면 뻣뻣한 수건이 되는데 이곳에서 수건은 다시 태어난 듯했다. 뽀송뽀송해진 수건을 만지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 그 분이 천천히 빨래를 개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도 수건을 한 장씩 꺼내서 정성스럽게 개어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았다. 쌓아 올려진 수건들이 이렇게 이쁠 줄이야! 오후에는 다른 빨래를 가지고 와야지 생각하면서 건조기도 살까? 고민하며 빨래방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