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큰 아이의 웃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이는 친구와 새벽까지 게임 중이었다. "얼른 자자."라고 아이에게 얘기하고 화장실에 갔다 나오니 눈이 말똥말똥 해졌다. 태풍이 온다기에 걱정되는 맘에 창밖을 내다본다. 오래된 베란다 샤시가 강풍을 견뎌낼지 염려가 되었다. 다행히도 굵은 빗줄기가 연신 유리창을 때리지만 바람은 아직 잠잠하다. 베란다 창을 열어놓고 자리에서 어제 읽다 만 책을 펼쳤다. 신경숙 작가의 신간 '작별 곁에서 '
책은 편지글로 이어진다. 일흔넷의 주인공이 있는 곳 맨해튼에도 태풍 샌디가 지나가고 있다. 거센 태풍으로 전기가 끊겨 초를 켜고 홀로 집을 지키며 선생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고 있다. 소설에서처럼 태풍으로 정전이 된다면 집을 밝힐 초가 필요할 것이고, 모든 카드 결제 시스템이 먹통이 될 것이니 현금도 뽑아둬야 할 것 같다. 인덕션도 안 될 테니 휴대용버너 부탄가스도 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걱정이 걱정을 낳고 있다. 이 생각을 잠재우려면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소설을 마저 읽고 주인공처럼 글을 쓰며 보내야 할 것 같다. 주인공은 어떻게 미국에 왔고 지난 30여 년간 어떻게 미국에서 살아왔는지 이야기한다. 주인공은 선생에게 다정하게 모국 말로 써 내려간다. 그렇게 새벽 소설을 읽다가 독수리 이야기를 만났다. 이 문장들이 하루 종일 마음속에 머물러 적어본다.
독수리는 하늘에서 칠십 년쯤 산다고 하네. 조류 중에서 인간의 수명과 비슷한 건 독수리뿐이지 않을까. 무리를 이루지 않고 홀로 하늘을 날며 날쌔고 힘차게 사냥을 하는 독수리지만 삼십 년쯤 지나면 노쇠하여 부리가 구부러지고 발톱이 뭉개진다네. 뿐인가. 구부러진 그 부리가 자라기까지 해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위협받고 오래된 깃털은 무거워져 높이 날 수도 없게 된다네. 다시 태어나든가 그대로 죽든가 해야 하는 순간이 독수리의 생애에 찾아든다네.
살아남고자 하는 독수리는 홀로 높은 산정으로 날아간다지. 암벽에 홀로 앉아 날카롭게 자라 살 속을 파고드는 발톱을 구부러진 부리로 뽑아낸 뒤에 바위에 스스로 몸을 부딪쳐서 무뎌진 부리를 부서뜨린다네.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새 부리와 발톱이 자라나기를 기다린다고 해. 새 부리로 맨 먼저 무엇을 하느냐면 낡은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내는 일을 한다는군. 그러고는 다시 창공을 날 수 있는 새 날개가 돋을 때까지 고통 속에서 기다리지. 그 과정이 수개월이 걸린다는군.
홀로 높은 암벽에 올라 가까스로 오래된 부리를 부수고 발톱과 깃털을 뽑아내는 늙은 독수리를 상상해 본 적 있나? 내 삶이 벽에 부딪힌 것 같을 때면 나는 그 독수리를 생각하곤 했어. 새 부리와 새 발톱과 새 깃털을 얻어 창공을 날아오르는 새롭게 태어나는 독수리를.
(작별 곁에서 p.70~71)
문장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본다. 읽으면서 내가 독수리가 되어본다. 홀로 암벽에서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늙은 독수리를 떠올리니 눈물이 찔끔 난다. 부리를 부러뜨리고 발톱과 깃털을 뽑아내는 고통보다 홀로 견뎌야 하는 고독한 시간들이 더 감내하기 힘들었으리라. 독수리의 삶이 인간의 생과 닮아있다. 젊은 시절 독수리처럼 살았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그냥 살았다. 매일매일 해가 뜨면 어제 하던 일을 하며 내일이 되어도 어제처럼 살아냈다. 무덤덤히 그런 시절을 지나왔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은 푸른 창공을 누비고 드넓은 바다를 날며 자유롭게 지내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새로운 발톱과 깃털을 기르고 있다. 광활한 바다 너머 높은 산에도 올라보고자 홀로 고뇌하는 시간들을 쌓고 있다. 가끔은 글쓰기가 힘들고 그만두고 싶은 날들이 생기기도 한다. 시간에 쫓기면서 써내던 글들이 태풍으로 집에 한가히 머무르면서도 쓰지 못하고 있다. 이 시간, 소설을 읽으며 독수리처럼 고개를 치켜새우고 두 눈을 부릅뜬다. 태풍은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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