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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호 Jan 04. 2022

평온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나이 50에 에세이 쓰기

 속초에 12월에 눈이 내린 건 정말 오랜만이다.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말이다. 보통 속초는 늦겨울 2월에 눈이 많이 내리는 편인데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야말로 폭설이 내렸다.  


 미리 예고되었던 폭설이라 1시간 일찍 퇴근해서 안전하게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남편은 근무였고 아이는  친구랑 맥도날드에 들렸다 온다고 해서 홀로 금요일 오후를 보냈다. 진한 커피 한 잔과 전날 먹다 남은 햄에그샌드위치 한 조각을 곁들여 먹으며 느긋하게 '밝은 밤' 소설을 읽었다. 


 아이는 친구와 놀다 7시쯤 들어왔고 8시가 넘자 눈이 오기 시작했다. 강아지처럼 들떠 베란다 창으로 연신 눈 오는 것을 구경하다 아이와 밖으로 나갔다. 캄캄한 밤하늘에서 펑펑 눈이 쏟아졌다. 아이와 난 어릴 적 눈이 오면 아파트 뒤 주차장에서 눈썰매를 끌어주던 이야기, 눈 온 다음날 아파트 단지 내 사람들 모두 나와 눈 치우던 이야기, 눈사람을 만들어 세숫대야에 모셔와 베란다에 두었던 이야기 등 눈에 얽힌 추억을 도란도란 나눴다.   

 

 이런 것도 다 다음날이 토요일이니 가능한 이야기였다. 만약 평일에 눈이 온다면 출근길과 등굣길 걱정으로 이런 운치도 못 느꼈을 것을 생각하니 크리스마스이브의 눈이 참 감사했다. 눈으로부터 아찔했던 순간이 참 많았기에 눈에 대한 낭만은 잠시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몇 년 전 양양으로 출퇴근하던 때 아침부터 내리던 눈이 심상치 않았다. 1시간 정도 쌓이는 눈의 양이 엄청났다. 함께 근무하던 직원들 중 속초에 사는 직원 5명이 한 차에 함께 타고 1시에 일찍 퇴근을 했다. 7번 국도 낙산 사거리에 오니 벌써 차들이 즐비했다. 갑자기 내린 눈으로 미쳐 제설이 안된 낙산 고개를 차들이 제설장비 없이 올라가다 미끄러져 서버린 것이다. 한참을 기다리다 더 눈이 쌓이기 전에 집에 가야 할 것 같아 양양 IC로 돌아 속초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곳도 경차가 미끄러지면서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다시 낙산사 거리로 돌아와야 했다. 


 속수무책으로 눈길에서 수많은 차들이 길게 줄지어 기다렸다. 꽉 막힌 도로에 제설차가 와도 비켜줄 공간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차를 버리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편에서 걸어서 넘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장장 5시간을 차 안에서 갇혀있었다. 정말 이러다 해가 지면 낙산 어느 모텔이라도 잡아서 자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도 낙산 고개 반대편에서 제설작업을 시작해 저녁 6시에 간신히 길이 열리고 우리는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치 한편의 재난 영화를 찍은 것 마냥 정말 험난한 하루였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밤새 내린 눈은 온통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길이란 길은 모두 눈으로 뒤덮였다. 밤새 낭만은 다시 사라지고 폭설이라는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도로 상황이 너무 나빠 남편은 도저히 차를 가지고 퇴근할 수 없어서 1시간을 걸어서 퇴근했다. 나는 아파트에서 제설작업에 동참해달라는 방송을 듣고 오전 내내 눈을 치웠다.


 눈이 많이 와서 친구 집에서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취소된 아이는 집에서 '크리스마스 스위치' 영화를 보면서 보석 십자수를 하고 남편은 밀린 잠을 자고 나는 '밝은 밤' 소설책을 마저 읽으며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눈 때문에 집에 갇혀서 분주하지 않았던 올해 크리스마스는 평온해서 더 좋았다.



© klimkin,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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