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부터 근처 도서관에 그림책 수업을 다니고 있다. 그림책을 좋아해서 수업에 참여하면 좋은 동화책을 많이 알게 될 것 같아 신청했다. 첫 수업이 열리는 날 기대 반 설렘 반 들뜬 마음으로 도서관을 찾았다. 단순히 동화책 수업으로 알고 왔는데 <동화책으로 마음 읽기> 수업이었다. 내향적인 성향인 나는 전혀 일면식 없는 사람들과 나의 사적인 이야기를 터놓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에 살짝 걱정이 좀 앞섰다. 프로그램도 잘 파악하지 않고 신청한 내 잘못이 크다는 생각에 우선 수업을 듣기로 했다.
첫날은 동화책 수업 들어가기 전에 자신을 사물에 비유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은 비유한 사물을 별칭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하셨다. 나를 무언가로 딱 정의하는 것은 항상 어렵다. 전날 올리브에 관한 책을 읽어서 순간 떠오른 것은 올리브였다. 또한 피자에 올라간 올리브를 좋아하고, 젊은 날 '올리브 나무 사이로'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올리브는 사물이 아니니 올리브 병으로 말이다. 올리브가 담긴 투명한 유리병은 언젠가 올리브를 다 먹게 되면 다른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 상큼한 오이피클이 담길 수도, 달콤한 과일청이 담길 수도 있다. 지금의 나는 나이 들었다고 힘없고 나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언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느낌으로 말이다.
사물을 정하고 서로 자신의 별칭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여하신 분들은 나와 같이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실의 엄마 역할 외에도 여자이고자 하는, '나'로 서고자 하는 분들이었다. 함께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처음 걱정했던 낯선 느낌은 좀 덜게 되었다. 소개가 모두 끝나고 선생님은 스크린으로 동화책을 보여주시며 직접 낭독도 해주셨다. 누군가 책을 나에게, 그것도 동화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스크린 때문에 살짝 조명을 어둡게 하고 선생님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숀 탠 작가의 <빨간 나무>라는 동화를 읽어주시는 것을 가만히 들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한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담임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책에 나온 동화를 읽어주시던 생각도 나고 말이다.
언젠가 모임에서 미래 희망을 동화 작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게 10년 전이다.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동. 화. 작. 가.라는 단어는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림은 못 그리지만 막연히 짧은 동화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빨간 나무>라는 심오한 동화를 만나니 동화 작가는 모두 철학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철학자가 아닌 나는 동화 작가는 아마도 못 될 것 같다.
두 번째 그림책 수업에서는 요시타케 신스케 작가의 <이게 정말 나일까?> 동화책을 읽었다. 책을 다 읽고 선생님은 각자 자신을 한번 표현해 보라고 하셨다. 표현력이 약한 나는 '나를 표현하기 힘들다'라고 짧게 적고 빈칸을 남겨두었다. 지난주 매매글방 주제도 나를 표현하는 형용사였는데 고민만 하다 아직 제출하지 못했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뭔가 나에 대해 쓸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다음으로 나의 현재 겉모습을 표현해 보는 활동을 했다. 신체가 그려진 종이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금의 나의 몸을 적어보는 것이다.
모두 적고 나니 50대 나의 몸은 성한 곳이 없다. 팔과 다리의 근육이 빠지고 허리와 무릎이 안 좋아지고 폐경이 가까워지고 있다. 신체적 노화가 시작된 몸은 여기저기 아픈 곳도 있고 신경 써야 할 곳도 많다. 하지만 나이 들었다고 자책하는 마음보다 젊은 때와 당연히 몸이 다를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몸에 대해 하나하나 자각하다 보니 몸의 소중함도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동안 글쓰기를 통해 나를 돌아본 시간들이 도움이 된 것 같다.
다음으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적어보라고 하셨다. 한참 종이를 쳐다보다 하나씩 빈칸을 채워 넣었다. 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도 어렵다. 예전 같으면 나의 단점도, 장점도 찾지 못했는데 이제는 속도는 느리지만 충분히 생각해 보고 찾아낸다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 좋아하는 것 : 음악, 등산, 책, 시, 돈, 가족, 꽃, 나무, 라떼, 드라이브, 배움, 서점, 도서관, 골목길, 화분, 하늘, 울산바위......
- 싫어하는 것 : 복잡한 것, 시끄러운 것, 게으른 것, 늦잠 자는 것, 지각, 부당한 것, 화장실 청소, 영양제(알약) 먹기, 흐린 날씨 연속......
그동안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을 내색하지 않고 살았지만 이제는 티 내며 살려한다. 남을 배려하듯 나에게도 배려심을 베풀려 한다. 쉰이 넘으니 그동안 붙잡고 있던 것들이 부질없음을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덕분에 붙잡지 않아서 홀가분할 때도 있다. 이 순간 내가 좋아서 하는 일들이 5년 뒤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지금의 사소함이 나중의 사소함이 절대 아님을 알기에, 해본 사람만이 완숙의 열매를 딸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