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퇴근하면 분주한 일상이 기다린다. 우선 집에 들어서자마자 얼른 냉동실 돼지고기를 해동해 제육볶음을 한다. 그리고 된장국을 앉히고 달걀을 꺼내 계란말이를 한다. 오늘 도시락 반찬은 제육볶음, 된장국, 계란말이다. 고딩 아이 저녁을 차리면서 남편 저녁도시락도 함께 싼다. 그렇게 서둘러 저녁을 먹고 편의점으로 간다. 남편이 작년 3월부터 편의점 경영주님이 되셨기 때문이다. 남편은 도시락이 맛있다느니 맛없다느니 이러쿵 저러쿵 말이 없는 편이다. 그렇다고 고맙다는 말은 더욱이나 없는 역시 무뚝뚝한 강원도 사람이다.
편의점에서 하루 14시간을 일하는 초보 경영주님이 안쓰럽고 건강도 걱정되어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건강식 도시락은 아니지만 집밥을 먹이려고 말이다. 화려한 도시락 데코스킬은 없으니 그냥 싸주는 것에 스스로 의의를 두고 있다.
도시락 뚜껑도 여러 개 열기 버거워하는 남편을 위해 웬만하면 하나의 락앤락 통에 싸가는 편이다. 그래서 주로 해주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먹기 편한(이라 쓰고 싸기도 편한) 볶음밥 종류이다. 볶음밥은 정말 사랑이다. 김치를 넣으면 김치볶음밥, 여기에 스팸을 추가하거나 참치를 추가한다. 가끔 새우와 야채를 넣어 새우볶음밥을 만든다. 함께 곁들이는 것은 계란국이나 심심한 된장국, 그리고 계란프라이 2개는 필수이다.
그다음으로는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제육볶음과 돼지고기김치볶음을 자주 싸준다. 주말에 마트에서 돼지고기를 사서 얼러놓는 편이다. 양파나 버섯을 함께 넣어 볶아주면 맛있게 먹는다. 역시 맛있다는 말은 안 하지만 결혼 20년 차 내공으로 싹 비워진 도시락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라떼이야기라고 하겠지만 우리 어릴 적엔 급식이 없어 도시락을 싸갔다. 나는 김치국물 흘린 도시락 때문에 창피했던 기억이 떠오르지만 남편은 시아버님께서 서른 넘어 낳으신 귀한 아들이기에 쏘시지와 햄이 들어간 도시락을 싸가서 항상 친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촌스런 나는 아직도 쏘시지와 햄을 싫어하는데 얘기입맛인 남편은 쏘시지와 햄을 사랑한다.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쏘야(쏘시지야채볶음)를 싸주거나 햄을 구워주면 좋아한다.
화가 나거나 서운한 게 있으면 밥을 안 먹는 투정을 부리는 남편과 여러 번의 위기(역시 나 혼자만 생각하는 위기)를 넘기면서 더 단단해지기도 하고 더 연약해지기도 하지만 20년 지기 우정으로 바라봐지는 날들도 있다. 만약 아이 도시락이라면 블로그와 유튜브의 특강(?)을 들으며 멋들어진 도시락을 쌌을 것이다. 하지만 남의 편의 도시락이라 주말 양양장에서 사 온 자연산 미역을 벅벅 씻어 담는다. 특별히 애쓰지 않은 지극히 평범하고 투박한 도시락이라도 잘 먹어주는 남편을 위해 오늘도 나이 오십에 도시락을 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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