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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호 May 06. 2023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내가 스물일곱 되던 해 돌아가셨다. 그 당시 나는 공연 조명이 배우고 싶다고 대학로 라이브극장에서 조명 스텝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공연 준비로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다 그만 계단에서 넘어졌다. 급한 마음에 계단을 2개씩 내려가다 발을 접질린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도 발은 호전되지 않았다. 혼자 자취를 하던 나는 발을 다치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당분간 쉬어야지 발이 나을 거라는 엄마는 돈도 안 되는 인턴 그만두고 내려오라고 성화였다. 오랜 자취생활에 골골하던 나도 못 이기는 척 간호를 받고 싶은 맘에 덜컥 극장을 그만두고 내려갔다.(베테랑 조명감독 언니가 계시니 내가 그만둬도 극장은 아무 상관없었다.) 한 달쯤 정형외과도 다니고 침도 맞으러 다녔는데 발은 호전이 되질 않았다.


내가 속초 집에 내려가 있는 동안 아버지는 계속 빨리 서울로 올라가라고 성화셨다. (나중에 어른들에게 들은 말이 돌아가시기 전 정 떼려고 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나는 오랜만에 뜨신 밥과 뜨신 집이 너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집에 없었고 나 혼자 아빠랑 있었던 밤, 갑작스럽게 아빠가 쓰러지고 야밤에 앰뷸런스를 타고 강릉병원으로 갔다가 안된다고 해서 다시 원주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결국 어쩔 수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나는 다시 아빠와 앰뷸런스를 타고 속초의료원으로 내려왔다. 속초의료원에 도착하니 동이 트고 가족들이 모여있었다. 나는 절뚝거리는 발로 그렇게 장례를 치렀고 그로부터 24년이 지났다. 


아버지와 함께 한 세월 27년, 떠나보내고 24년. 아빠를 생각할 때 기억나는 것은 구두와 함박눈, 조그만 수첩이 생각난다. 구두는 내가 호텔에 근무할 때 설 명절에 금강제화 구두 티켓이 나왔었다. 그 티켓을 아빠 구두 사 신으시라고 드렸는데 어느 날 근사한 깜짱 구두를 사 오신 것이다. 사실 아빠는 구두 신을 일이 별로 없으시니 구두는 항상 새것 같았다.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보니 그 구두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신발장을 보았다. 낡고 헤어진 아빠의 신발들 사이로 정말 빤딱빤딱 윤이 나던 그 구두. 구두를 아버지의 옷가지 몇 개와 함께 태워드렸다. 내가 사드린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나온 티켓을 드린 것이 후회되었다. 아니 함께 가서 구두를 사드리지 못해 미안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겨울 어느 날 함박눈이 내렸다. 주택에 살았던 우리 집은 눈이 오는 날이면 언제나 아빠가 눈을 치우셨다. 우리 집 마당뿐 아니라 동네 큰길까지 눈을 치우고 연탄재를 뿌려놓으셨다. 그런데 아버지 가시고 눈이 오는데 눈을 아무도 안 치우는 거다. 마당 장독대까지 덮어버리는 눈을 보며 아빠가 그리워 울었던 기억이 난다. 울면서 혼자 눈을 치우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한 10년쯤 지났으려나 결혼하고 한창 아이들 육아에 정신없을 때 집안의 짐을 정리하다 문득 낯익은 수첩을 발견했다. 열어보니 전화번호부 수첩이었다. 아버지의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젊을 적 그래도 면사무소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으셔서 우리 아버지는 글씨가 달필이셨다. 가지런히 정갈하게 적혀 있는 글자들 사이로 아버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그만큼 시간이 흐르니 슬픔도 상쇄되는 것인가.


어버이날이 다가오고 있다. 살아생전 카네이션을 사드렸는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내가 아직 아버지를 기억하고 내 아이들이 뵌 적도 없는 외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아실까.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지은 두 편의 시가 있다. 이 시가 오늘은 아버지에게 가서 닿았으면 좋겠다.




연필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우리 집엔 연필깎이가 없었다


일요일이면 아빠는

4명의 아이들 연필을

손수 깎아주셨다


거실의 달력 한 장을 뜯어

마룻바닥에 깔고

연필을 깎으셨다


나무를 먼저 깎아내고

연필심을 갈 때 나는

"사각사각" 소리가 참 좋았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사각사각 뾰족하게

연필을 깎고 싶은

볕 좋은 봄날이 가고 있다.






눈 오는 날 아버지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아버지


눈 오는 날이면

새벽부터 마당이며 골목까지

말끔히 치워주시던

손길이 그립습니다


파아란 하늘이

시리도록 슬펐던 여름 어느 날

하늘로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맞은 첫겨울


마당 가득 메운

함박눈을 바라봅니다.


그 눈들을 치우며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자식들 미끄러질까 봐

골목 앞까지

말끔히 치우시고

연탄재도 흩뿌려놓으셨는데...


지금 아버지 나이가 된 딸은

유년의 새벽 골목길에서

아버지를 만납니다.


아버지의 투박하고 주름진

손이 차갑습니다.

그 손을 맞잡으며 웃어봅니다.


하늘에서 하염없이

함박눈이 쏟아집니다.


온 세상 가득 눈이 옵니다.

이제 아버지의 손이 따뜻합니다.





© donaldnordeng,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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