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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Mar 31. 2022

책의 자리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그 형을 안 지도 오래됐다. 큰 사업을 하며 대대로 부유한 집의 독자로 자란 그 형과 나는 우연히 서로 글과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친하게 되었었다. 지금은 다시 본가로 돌아가 훌륭하게 가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당시 형은 젊은 날 해외 카지노에서 큰돈을 탕진해서 어머니로부터 삼 년 이상 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유배 조치를 받았었다. 내가 그 형을 만난 건 그 형의 유배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때엔 그 얘기를 듣는 나로서는 참 믿기 힘든 드라마 같은 스토리였다. 그런데 지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한 기업의 리더로서 큰 몫을 하고 있는 형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그 시절, 삼 년 이상 서울에서 방을 얻어 살며 하루하루 보내는 형에게 유일한 낙은 독서였다. 그 형의 책을 읽는 속도와 양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이런 것이 활자중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형은 다른 부잣집 아들과는 다르게 문화 예술에 관심과 지식이 상당했고 그런 그 형의 박식함을 뒷받침해주는 건 바로 어마어마한 독서량이었다. 그 형은 당시 글을 쓰는 내게 여러모로 잘해주었는데 그중에 제일 재미있는 일은 종종 멀쩡한 책을 십 여 권씩 내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웬 책이냐고 물으면 형은 며칠 전에 산 건데 다 봐서라고 대답하곤 했다. "아니 책을 다 읽었다고 그렇게 다 다른 사람 줘버려요? 완전 새 책인데?"라고 물으면 형은 "그럼 다 본 책을 내가 뭐 하러 가지고 있냐?"라고 대답하곤 했다. 형에게 책은 읽을 대상이지 보관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형이 머무는 집에 가면 책이 꽤 있긴 했지만 그건 모두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었다. 아마 읽은 책 까지 모두 소장하고 있었다면 별도의 건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그 형의 책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 또한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됐다. 이사할 때마다 고생스러운데도 늘 이고 지고 다니던 책 상자들. 때로는 책장에 가지런히 꽂히지만 때로는 박스 속에서 그대로 몇 년을 보내기도 하는 책들.

책들을 누구에게 주거나 파는 걸 분명히 아까운 일로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다 읽은 책은 물론 앞으로 몇 해가 지나도 결국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을 쌓아두고 있는 게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저 책이 가득한 거실이나 서재에 있는 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그 책을 읽을 만한 사람에게 보내주는 게 더 좋은 일 아닐까.


어느 겨울 나는 형편이 많이 어려워서 난방이 안 되는 옥탑 작업실에서 고양이를 껴안고 자며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다. 어떻게든 생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쌓여 있는 책들이 내 눈에 들어왔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적이 떠올랐다. '그래, 책을 팔자!' 나는 배낭에 상태가 괜찮은 책들을 가득 채우고 중고서점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중고서점에서 책을 판 그날, 나는 십만 원이 넘는 돈을 손에 쥘 수 있었고, 나처럼 힘겹게 겨울을 나던 아래층 조각가 후배와 함께 따뜻한 식사를 먹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책이 아주 많았다. 책을 좋아하는 아버지 덕에 각종 전집과 다양한 책들이 집 안의 모든 벽을 가리고 있었고 아버지는 더 이상 책장을 세울 데가 없어서 고민하셨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이사할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책만을 위한 대형 트럭이 별도로 와야 할 정도로 책 박스가 많았고 포장이사 개념이 없던 당시에는 책을 포장하는데만 일주일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그 시절 그 많은 책들 중에 내가 읽은 건 십 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을 모은 아버지도 모든 책을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집 책의 쓸모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괜히 어깨 으쓱대는 용도 아니었을까.

이젠 내가 가진 거의 모든 책을 처분해서 남은  오십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읽은 책은 금방 처분하고, 읽고 싶은 새로운 책을  구입하고 있다. 그렇게 오십  정도가  책상 옆에서 유지되고 있고   책들을 선택의 고민 없이 바로바로 펼쳐서 독서를 하는 즐거움을 얻었다.


옥탑 작업실 시절 중고서적에 책을 판 덕에 나는 난로에 기름을 넣고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봄이 오고 작업실을 합치자는 논의를 하던 당시 연인은 내 얘기를 듣고는 자신의 책도 일부 팔겠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린 텅 빈 책장에서 시작하겠구나." 그녀는 슬픈 마음으로 뱉은 말이었겠지만, 난 그 말이 마음에 들어서 씩 웃었다. 이제 예전 책들이 있던 빈자리는 책을 읽고 남은 수많은 생각들이 채우고 있다. 내 책장은 수시로 비워져 내게 삶의 여유를 주고 내 마음속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책은 책장에 꽂혀 있을 때 빛나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꽂혀 있을 때 비로소 빛이 나는 것이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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