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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Mar 31. 2022

라디에이터를 켜 둘게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누군가 오슬로에서 올린 동영상을 보았다. 천천히 눈이 오고 있었다. 그곳에는 눈이 왔구나. 밑에는 올해의 첫눈이라고 쓰여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몇몇 북쪽 동네의 이름들을 중얼거렸다. 이제 곧 그곳들이 모두 하얗게 변하겠지. 가고 싶다. 


해뜨기 훨씬 전 캄캄한 새벽에 눈을 뜨지만 빨리 정신이 맑아지지 않는다. 설정해놓은 루틴 알람은 네시 반이 되면 내게 일어나라고 말을 걸고 스트레칭을 하라고 한 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준다. 그리고 6시가 되면 내게 오늘의 날씨와 약속이 있는지를 알려주고 뉴스를 보여주며 약을 챙겨 먹으라고 한다. 약을 먹고 물을 마시고 에스프레소 머신의 스위치를 누르고 사과 반쪽을 먹고 소파에 털썩 앉아 서서히 밝아오는 창밖을 본다. 

새벽에 내 옆으로 끌어당긴 라디에이터가 방안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밤새 폭설이 내린 것처럼 쌓여있다. 놓치고 싶지 않은 단어들 몇 개를 주워 종이에 적고 갑자기 생각난 좋아하는 소설책 한 권을 꺼내서 펼쳐보았다. 식어버린 에스프레소를 한 입에 털어 넣고 혼자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중얼거리는 내가 웃겨서 피식 웃었다. 순식간에 푸른 여명은 사라지고 투명하고 깨끗한 아침 햇살이 방안 구석구석을 랜턴처럼 비추고 있었다. 잠에서 깬 고양이가 내 곁에 다가와 소파 팔걸이에 앉았다. 일인용 암체어에 앉아서 메모장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왼쪽 어깨 곁에서 고양이의 숨소리가 들리는 게 문득 든든하다고 느껴졌다. 그래 너와 나는 이 고요한 방의 유일한 동지지.


라디에이터를 끄고 서서히 식는 라디에이터의 금속 몸체를 만져보았다. 나는 라디에이터를 좋아한다. 내 작업실은 지열 보일러 바닥 난방과 벽걸이 냉난방기가 설치돼 있어서 기본적으로 바닥 난방을 하다가 많이 추우면 잠깐씩 난방기의 따뜻한 바람을 더해주면 되지만, 아직 겨울이 아닌데도 싸늘한 밤을 보내야 하는 날에는 라디에이터 하나만 틀고 자면 적당하다. 보조난방기구로써 라디에이터는 등유난로처럼 활활 타오르지 않지만 은은한 열기가 다정하고 코일 스토브처럼 바로 뜨거워지지 않지만 더 넓고 깊게 온기를 느끼게 해 준다. 

내가 무엇보다 라디에이터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 녀석이 말이 없기 때문이다. 작은 소음 하나 없이 아주 조용하게 방을 데워준다. 그러나 고장 난 라디에이터는 결코 조용하지 않다. 파리의 아파트에 있던 낡은 라디에이터는 종종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잠을 설칠 때가 많았다. 가끔 한국에서처럼 바닥에 누우면 차가운 마룻바닥이 등에 닿아 척추뼈가 서늘해짐을 느끼는 방. 푸른 새벽 속 마룻바닥에서 먹다 만 치즈 조각처럼 웅크리고 있노라면 창밖의 세상이 과슈를 칠한 것처럼 푸른 종이로 변하기도 했다. 굴뚝이 많은 파리지만 나는 그 굴뚝들에서 연기가 나는 걸 본 적이 없다. 모두가 고물 라디에이터 앞에서 나처럼 몸을 구긴 채 추운 밤을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창밖에 보이는 불 꺼진 집들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으슬으슬 추운 방에서 라디에이터 온기에 의지해 누워있는 우리에게는 종이처럼 얇은 천이 세상과 우리 사이에 놓인 국경이었던 것이다.


전원 꺼진 라디에이터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었다. 라디에이터의 은은한 열은 방을 비워두고 외출을 할 때 라디에이터를 끄지 않았더라도 그다지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전기스토브나 등유난로는 혹시 내가 없는 동안 불이 나면 어쩌나 걱정이 되는데 라디에이터는 그런 걱정이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없는 동안 누군가 내 방에 찾아 올 일이 생긴다면 나는 외출할 때 그 사람을 위해 라디에이터를 켜 두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방은 그때 파리의 방처럼 누구도 올 일이 없으니 그런 말을 할 일도 없어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 때나 왔다 가, 라디에이터를 켜 둘게.”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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