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문학관: 시인의 언덕'을 다녀오다
지금으로부터 5년전, 그러니까 군을 전역하고 대학교에 복학했던 25살, 대학교 3학년 시절에 썼던 글을 발견했다. 당시 내가 읽고, 느끼고, 고민했던 것들을 이렇게 갑작스레 무방비 상태로 접하니 기분이 묘하다. 시간은 참 무던하게 꾸역꾸역 잘 흘러가는구나. 시간은 정말 많은 것들을 변하게 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변하지 않는 무언가 또한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삶이란 참 아이러니하다. 이 글을 통해 25살의 나를 다시 만났다. 그 친구를 이렇게 다시 보게되니 반가우면서도 안쓰럽기도하고 참 대견하기도 하다. 글을 쓰고 기록을 남겨야만 하는 이유를 또 하나 발견했다.
비겁해진 영혼을 일깨우는 영혼의 가압장
2014년 10월 9일 한글날. 윤동주 문학관으로 향하는 마을버스 창가 자리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그의 이름 세 글자를 마음속에 새긴다는 심정으로 천천히 되뇌어 보았다. ‘윤. 동. 주.’ 가슴 한편이 뭉클해지면서 괜스레 마음마저 숙연함으로 짙게 물들었다. 마음속으로 그 이름 옆에 조심스레 내 이름 세 글자를 쓰다가 이내 지워버린다. 부끄러웠다.
2010년, 나는 조심스레 문단에 어설픈 창작시 몇 편을 투고하였었다. 그리고는 내 조잡하기 짝이 없는 등단 작품들이 실린 출판물을 지인들에게 나눠주었었다. 그 후, 지인들이 장난삼아 나를 부를 때, 내 이름 앞에는 항상 ‘시인’이라는 부끄러운 두 글자가 따라다녔다. 그때는 그게 자랑스러웠다. 초심을 잃지 않고 더 열심히 창작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었다. 그러나 2014년 지금의 나는 시집보다는 전공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 시정과 시상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당장 먹고 살길을 찾는데 모든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래서 등단한 지 4년이 지났지만, 노트에는 고작 몇 편의 졸작들이 마침표도 찍지 못한 채 파르르 떨고 있다.
반면 윤동주 시인은 내 또래의 나이에, 그것도 비극의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이에 굴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민족의 가슴을 울리는 시를 창작하는데 몰두하였다.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들을 접한 이후로 윤동주 시인은 내게 무척이나 큰 존재로 자리잡아왔다. 그는 실질적으로 나의 선생이자 존경의 대상이었고, 나의 영웅이었다. “어쩔 수 없지.”라며 버거운 현실에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시집을 덮고 절필하려는 내 비겁한 모습과 시인으로서의 윤동주의 삶은 너무도 멀었다. 이러한 괴리감은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졌고, 책장에 걸려있는 그의 유고시집을 바라볼 때 나는 경외감까지 느꼈다.
하지만 이 글의 초고를 퇴고하면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1945년, 그 당시 그의 나이는 나보다 고작 2살 많은 27세였다. 그는 경외의 대상이기 이전에 나의 또래였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 역시 내가 느끼는 20대의 질풍과도 같은 감정들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고민에 때로는 짓눌리고, 때로는 씩씩거리며 이에 저항했던 한 청춘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나는 그동안 ‘인간 윤동주’를 보기 이전에 ‘윤동주의 작품’만을 보아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나는 본 감상문에서 ‘윤동주 문학관’ 관람을 통해 느낀 ‘인간 윤동주’와 ‘25세 필자에게 윤동주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문학관’은 종로구 청운동에 있다. 머리 위로 고가가 지나는 인왕산 길과 북악산 길을 잇는 아스팔트 옆자리. 청운동과 부암동의 경계에 자리한다. 도로 옆에 늘어선 은행나무 잎들 사이로 시인의 순결한 시심을 상징한다는 순백색의 전시관인 ‘윤동주 문학관’이 보이고 그 위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있다. 건물 입구에는 교복을 입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얼굴과 그의 작품 ‘새로운 길’이 윤동주의 육 필체로 정갈히 쓰여 있었다. 그가 절명하고 난 후, 그의 혼을 기리는 장례식장에서 어머니가 소리 내어 읽었다는 그 시이다. 아들이 걸어온 길과 그 혼이 새롭게 걸어갈 길의 문턱에서 아들을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가슴이 뭉클해졌다.
제1전시실에 들어서자 윤동주의 삶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 연보가 보였다.
그 중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1938년 : 윤동주는 법대, 의대를 원하는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희전문대학교 문과대학에 입학했다.’는 문구였다. 학부 1학년 때, 희망학과 지원과정에서 경제학과에 가길 바라시는 부모님의 의견과 정치외교학과에 가고 싶었던 나의 의견이 충돌하여 이를 조율하던 내 모습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그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쳤다니 항상 우러러보며 감히 다가서기조차 힘들게 느껴졌던 윤동주 시인이 연세대학교에 다니는 동년배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문구는 ‘1945년 :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었다. 27이라는 숫자를 보니 가슴이 욱신욱신 쑤셔왔다. 정지용 시인은 윤동주의 유고시집 서문에 이렇게 서술했다고 한다. ‘만일 윤동주가 이제 살아있었다면 그의 시가 어떻게 진전하였겠는가?’ 정지용 시인은 시인으로서, 문학사적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의 윤동주가 견뎌야 했을 현실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나처럼 캠퍼스를 누비고,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연애에 대해 고민할 나이에 옥중에서 그가 견뎌야 했던 처절한 삶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전시실에는 그의 일생을 보여주는 사진과 육필원고 작품들이 9개의 전시대 안에 배열되어 있었다. 전시대 유리관 안의 빛바랜 종이 위에는 윤동주가 육 첩 방 책상 위에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썼을 시의 원고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동안 그의 시를 접할 수 있었던 매개인 수능 시험지, 컴퓨터로 인쇄된 인쇄본들 속에서 느낄 수 없었던 그의 시정이 가슴에 스미는 듯했다.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정갈하고 깔끔한 그의 글씨를 보아 그의 성격을 간접적으로나마 유추할 수 있었다. 윤동주 동생의 회고록에는 그가 ‘단 한 번도 남을 헐뜯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옷의 잔주름이 가지 않게 깔끔히 다려서 입고 모자가 삐뚤어지지 않았는지 항상 고쳐 쓰곤 했다.’라고 묘사되어있다. 그런 인격이 글씨에 그대로 묻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나이와 비슷한 지금의 나를 고려할 때, 윤동주 역시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은 20대 초중반이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그가 한층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의 영웅으로서의 윤동주’ 이전에 ‘나와 동년배인 한 인간으로서의 윤동주’의 삶을 체감하며 제2전시실과 제3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2전시실은 윤동주의 대표작 ‘자화상’의 제재인 ‘우물’을 형상화한 공간 전시물 이었다. 제3전시실에서는 그가 옥사한 후쿠오카 형무소를 형상화한 곳으로서 윤동주 시인의 일생을 다큐멘터리화한 영상을 감상하였다. 두 전시실은 2014년 서울시 건축상을 받은 곳으로서 용도 폐기된 가압장의 물탱크를 리모델링한 것이라 한다.
시인의 언덕
‘윤동주 문학관’을 감상한 후, 옆쪽으로 난 계단을 올라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올랐다. 구불구불한 산길 언덕을 오르니 눈앞에 펼쳐진 가을의 정경이 시의 운율처럼 청초하게 느껴졌다. 계단을 올라 언덕에 올라서니 그의 영혼을 모셔놓은 ‘윤동주 영혼의 터’가 자리 잡고 있었고 커다란 바위 위에 그의 육 필체로 ‘서시’가 새겨져 있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여 사람으로 태어나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기는 죽기보다 어렵다. 더욱이 부끄러움 없이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제 치하의 암울했던 시기. 만일 내가 그와 동시대에 살았다면, 나는 윤동주처럼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기나 했었을까? 잠시 멈춰서 시비를 정독하며 자신에게 되물어 보았다. 이 산책로는 생전 윤동주가 즐기던 산책길이었다고 한다. 윤동주 역시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별 하나에 추억, 별 하나에 사랑, 별 하나에 씁쓸함, 별 하나에 동경,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를 그렸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 동안 부암동 자락을 돌고 또 돌아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모양이다
문학관에서 느꼈던 것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내 또래의 ‘인간 윤동주.’ 그 역시 나와 같이 무엇을 하더라도 멋있게 보이고 싶고, ‘사랑, 우정, 정의, 인생’ 같은 것들을 고민하던 청춘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를 친구처럼 생각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나처럼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마주했던 불운의 현실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굳건히 지켜왔기 때문이다. 천천히 걸으며 시간을 확인하려 켠 휴대폰 화면에는 ‘10월 9일. 목요일 오후 7시.’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게 오늘이 ‘한글날’임을 다시 한 번 인지했다. 식민지 조국의 현실 아래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며 민족 언어를 완성하려 했던 그의 노력이 ‘한글날’인 오늘 더욱 절실히 와 닿았다. 늘어선 은행나무 밑을 걸으며 어린 나이에도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성하며 한 길만을 고집했던 그의 인생을 생각했다. 동시에 세상사에 지쳐 비겁해지는 내 모습을 윤동주의 인생이라는 우물에 비추어 보았다. 그가 ‘참회록’에서 말했듯, 나 역시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내기로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주황빛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응시하며 ‘동 섣달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았던 조선 청년 윤동주.’를 생각했다. 구름 낀 밤하늘 사이로 한줄기 별빛이 보였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