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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Sep 28. 2023

어머니, 죄송했어요

추석 이브, 진상며느리의 묵은 사죄

한 달 전 요양병원에서 뵌 어머니는 꼭 잡은 손을 오래 놓지 않으셨다. 어머니, 다시 뵈러 올게요.




어머님 큰 아들과 결혼할 때 4대 제사에 어른들 생신까지 일 년에 열두 번 필수 행사니라 말씀하셨었죠. 사실은 너무 어려서 종갓집 장손 며느리가 어떤 건지 잘 몰랐어요. 시키시는 대로 맨발로 마당으로 뛰어나가 어른들을 맞았고 제사나 차례 때마다 큰절 작은 절 배웠어요. 그렇게 오 년 한복으로 뛰다 보니 저를 바라보게 되었죠.


이 정도면 되었어. 나는 이제 나로 살겠다. 명절 때 전을 부치거나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하면서도 다 이런 거려니 하며 참 열심히도 했어요. 그렇게 보낸 설거지 5년 만에 재미도 느끼고 과학적으로 그릇 쌓는 방법도 나름 터득했어요. 사람이 뭔가에 재미가 붙으면 연구하게 되고 알게 되고 좋아하게 돼요. 설거지 좋아해요.


그런데 어머님, 제가 매번 화가 났던 건 아버님이셨어요. 일에 찌들어 살던 어머님 큰 아들이 고향집에 내려올 때만 기다리시던 아버님, 큰 아들이 해야 할 과수원일 밭 논일을 남겨 놓으시고 기다리셨죠. 동네 연예인이셨던 아버님이셨다는 거 압니다. 키 186센티에 노래도 잘하시고 농담도 호탕하신 것도 알아요.


어느 명절 전, 남편에게 선전포고했어요. 아버님께서 시키신 일을 하러 나가면 가만있지 않겠다고요. 사실은 아버님께 한 선전포고였지만, 큰 아들은 여느 때처럼 아버님께서 시키신 일을 고분고분 하러 나가더군요.


아, 개빡침!


마당에 빨갛게 서 있다가 대문을 박차고 나갔어요. 시내 나가는 길목 슈퍼마켓에 들어가 산사춘 2병을 덜렁덜렁 들고 집 사랑채로 들어가 벌컥벌컥 마셨어요. 분노와 섞이니 물이더라고요. 마루에서 고구마 줄거리를 다듬던 어머님께 싱긋싱긋 웃으며, "어머니!" 했던 거는 기억하시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근데 고구마 줄거리가 손에 잘 안 잡히는 거예요. 산사춘 2병으로 세상이 보라색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벌렁 어머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어머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고구마 줄거리를 다듬으러 꿈속으로 갔었죠. 깨어보니 깨질듯한 머리를 침대에서 들 수가 없었어요. "괘안나?" 얼음 꿀물 타다 주시던 어머님... 죄송해요.


전 그때 아버님이 너무 미웠어요. 내 사람 초과근무시키시는 게 너무 싫었어요. 수당도 안 주시면서.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님께서는 제가 미우셨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어머님께는 아버님이 더 소중하셨을 텐데 말이죠. 미우나 고우 평생을 옆에서 알뜰살뜰 지켜주셨던 분이셨으니까요.


어머님께선 왜 그때 제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저를 혼구멍을 내서 눈물을 쏙 빼게 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요. 철없는 저를 항상 받아주시고 제 편 해주신 거 고맙습니다, 어머님.


5년 전 아버님 떠나시고 많이 외로우실 거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그때 좀 참을걸 그랬어요.


내일 추석 차례상 준비해야 하는데 저 오늘 산사춘 한 병 했어요. 맵디 매운 청양고추랑요. 매워 나는 눈물인지 취해 나는 눈물인지 모르겠어요. 어머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어머님께서 허락하셨던 그 무릎이 생각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우리 곧 다시 어머님 뵈러 갈게요.




몇 년 이내 어머님을 모시고 같이 살 계획을 세워두었지만 항상 불안하다. 암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인지장애를 겪으시면서도 나를 놓지 않으시는 어머니, 감사합니다.


나를 낳아주신 엄마의 돌아가신 날이 우리 어머님의 생신이다. 음력 11월 23일, 해마다 겨울 그날이 오면 나는 돌아가신 내 엄마에게 거기서 잘 계시는지 새벽 인사를 드리고, 내 남편의 어머님께 생신 축하 인사를 드린다. 그런 내 인생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그게 나의 특별한 삶이려니 나를 다독이기로 했다.


가을이니 곧 겨울이 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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