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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Oct 12. 2023

데미안과 나

이 책을 읽고 네 생각이 났어, 네게 주고 싶어

섣부르게 거친 감성이 10대 중반으로 다다랐을 무렵, 반에서 존재감 한번 없던 조용한 아이가 책을 한 권 불쑥 내밀었다. '이 책을 네게 주고 싶어.' 내 생각이 나게 했다는 데미안은 친구로부터 그렇게 왔다. 헤르만 헤세도 그때 왔다.


데미안을 읽고 나서 그 때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책을 준 너를 생각해야 하는 건가. 그 아이와 마주쳤던 그때의 눈빛, 반짝였던가 눈물이 차 있었던가. 나를 향해 움직이는 눈빛을 기억한다.


나는 아프락사스를 위해 가고 있는 건가. 세계라는 알을 깨고 진정한 나로 날아올라 향해야만 하는 나의 신, 아프락사스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처음 읽었을 때는 피식, 아프락사스... 작가들이란 그랬다. 내 마음속, 그 아이의 눈빛이 더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무시하려고 애썼다. 진정한 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두 번 세 번 읽으며, 영어 원서로 읽으며 데미안에서 에바부인에서 아프락사스를 아프게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원서를 몇 번씩 읽으면서 항상 눈이 뜨거워지는 곳이 있다.


I wanted only to try to live in accord with the promptings which came from my true self. Why was that so very difficult?


진정한 나 자신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소리에 맞추어 살려고 했을 뿐인데, 그게 왜 이렇게 너무나도 힘들었던 걸까.


알이라는 세계를 깨야만 알 수 있는 진정한 나를 진심으로 구하고 있었다. 아프락사스가 더 멀어져 갔다. 대신 내가 빠져버린 곳은 '별'이었다. 데미안에는 '별'을 사랑하는 청년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벼랑 끝에서 그리움에 별에 닿으려고 뛰어오르다 스스로 헛되다 체념하자마자 산산이 땅으로 부서져 죽는다. 거기에 오랫동안 절절매고 있었다. 자신을 믿고 그 별을 믿었다면 그 별에 닿을 수 있었을 텐데. 오랫동안 가슴이 아팠다.


지금도 별 이야기가 가슴이 아프다. 나는 별을 믿을 것이다. 나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지난 4월 2일부터 데미안 원서 표지 첫 글자부터 왼손필사를 시작했다. 표지 첫 글자부터 강박이 따라붙어 하나도 빼지 않고 내 것을 만들겠다는 비장함이 있었다. 그러다 토마스 만의 데미안 서문에 마음을 빼앗겨 필사와 영어 낭독을 같이 했다. 토마스 만의 서문을 실은 한국어 번역본을 기어코 찾아내어 한국어 서문도 낭독해 두었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데미안 필사와 초세밀 읽기, 마음에 드는 부분을 낭독하고 있다. 행복하다.


필사를 하다가 어떤 단어나 표현이 마음에 꽂히면 그걸로 글을 쓰고 있다. 싱클레어가 크로머에게 샅샅이 괴롭힘을 당하는 1편에서 나는 표현을 빼내어, 별에 닿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젊은이의 마음을 표현하듯 내가 향한 애틋한 마음도 기록해 두며 매일을 열고 닫는다.


오늘 드디어 1편을 마치고 내일 2편, Cain을 들어간다. 드디어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는 장이다. 내가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한 듯 괴로웠던 장을 지나간다 생각하니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는 것 같다.


표지까지 어림잡아 175페이지 원서에서 오늘 25페이지까지 필사를 마쳤다. 약 6개월간 25페이지를 마쳤으니 남은 날은 36개월쯤 되려 나보다. (암산했는데 산수바보라 계산이 맞나 모르겠다.) 3년 후에는 내 인생의 커다란 변화들을 겪고 있을 때다. 그 변화가 아무리 크다해도 이 데미안은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나의 마음으로부터 울려오는 진실한 소리들 (the promptings from my true self), 영화 Dancer in the Dark (2000)의 셀마가 절절하게 외친,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Listen to your heart.)'를 붙잡고 사는 삶은 결국 내가 아프락사스에게 다다르는 길일 것이다.


공허하거나 헛되지 않으려는 끊임없는 몸부림, 그게 인생이다.



사진 - 원서 책 표지, Hermann Hesse. (1989). Demian. First Perennial Library edition, Harper & Row,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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