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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그렸어요

떠나는 아이가 준 선물

by 희수공원

종종 과거를 뒤지다 새로운 순간을 만난다. 스마트폰 사진 정리하다 발견한 팝아트 작품, 가만히 생각하니 작년에 그만둔 아이가 그려준 내 모습이다. 풉풉 웃으며 가만 들여다본다.


멀리 이사 가는 아이가 쑥 내민 종이 한 장에는 나도 낯선 내가 흔들흔들 춤추고 있었다. 책상 위를 온몸으로 가리고 오지 말라 손을 휘저으며 혼자 키득키득 몇 분만에 그린 그림은 아이 눈에 비친 내 정체성이었다.


아이 눈에는 내가 저렇게 보였구나. 지금은 어떠려나. 주먹 같은 살찐 코에 호빵 같은 큰 얼굴 바늘구멍 같은 눈에 주근깨도 양 볼에 흩뿌려 놓았다. 그래도 웃는 입이 고맙다 그랬다.


아이들의 심리검사에는 그림검사를 보조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사 가며 앞으로 거의 볼일 없는 영어 선생님을 이렇게 그린 건, 이 아이의 마음에 자리할 내 모습이라 나도 자꾸 마음이 갔는지 스마트폰 업데이트를 여러 번 하면서도 남겨둔 그림이다.


목까지 잠근 옷 단추랑 즐겨 입는 긴 스커트, 단정한 납작 구두랑, 거기까진 좋았는데 흔들흔들 저 발 모양은 걷고 있니 춤을 추니 물으니 싱글싱글 개구지게 춤추는 거 맞단다. 오래전 BTS, Butter 딱 1초 따라 하다 꼬인 스텝을 기억하고는 기어이 키득댔던 아이, BTS를 꽤 잘 따라 하던 아이였으니 내가 웃길 만도 했을 것 같다.


같이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고 연기하며 보냈던 날들 지루함을 못 참는 나의 변덕에 아이들 스스로의 색깔을 내게 뿌리며 같이 만들어 갔던 시간들, 스스럼없는 웃음과 미소가 그립다.


요즘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조용해지고 어두워지는 아이들이 많아져서 어떤 신나는 악기를 만들어야 하나, 어떤 흥미로운 무기를 선보여야 하나 고민이 한가득이다.


아, 그래도 떠나는 아이에게 고마웠던 건 등에 그려준 날개였다. 내가 새처럼 자유롭게 보였는지 아님 화내지 않아 천사같이 보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떠나는 날 훈장처럼 큰 선물이었다. 아쉬운 마음 달래며 꼭 안아주고 보냈다. 나를 지나간 아이들이 원하는 것들을 하며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일 마지막 수업인 아이들에게 내 모습을 그려달라 해볼까. 후훗!



그림 - 영어 선생님(Teacher) by Juree 20220530

#라라크루 (1-7) #라라라라이팅 헤어지는 아이에게 남은 내 모습에서 미래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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