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꾹꾹 눌러 주름을 만들어 접을 때마다, 끝이 마주 붙었다가 떨어지는 종이부채의 날들처럼,
묘사되는 시간의 만남이 흥미로운 영화였다. 엔딩크레딧쯤에서야 아... 하게 되는 불편한 영화다.
절제의 반전이 더 깊은 절제로 표현되는 이 안타까움이 오래 남는다.
양조위라는 이름 하나로 개봉일이었던 지난 4월 26일 수요일, 커다랗게 텅 빈 극장 한 귀퉁이에 앉아 있었다.
느와르에 스릴러가 합쳐지면 보는 편이다. 예민한 표정과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가진 배우라면 충분하다.
2007년 그와 탕웨이의 Se, jie (色, 戒; lust, caution)와 같은 시대적 배경의 스릴러라는 것에 더 끌렸다. 암울, 혼란, 경계, 통증 그리고 사랑...
이 영화를 보고 '느와르' 장르에 대해 자료를 뒤지고 논문을 찾아가며 한바탕 또 미친 짓을 했었다. 나는 이 영화를 느와르로 보지 않는다. 그 시대에 맞는 드라마, 내가 살고 싶은 드라마일 뿐.
촛불을 밝혀 작은 배를 하나씩 띄엄띄엄 보내고 있다. 매번 눈물이 쏟아지려 하지만 영화에서 배운 절제를 실천하는 중이다. 이 배들이 나중에 하나의 큰 무리로 모여 어떤 형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일단 모든 소망을 담아 띄운다.
갑작스러운 하나의 찰나에 무작정 시작해 놓고 보는 나쁜 습관이 있다. 벌써 떨리고 흔들리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너무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주위의 말림에도 자꾸 나의 두뇌가 흘러내리는 것 같다. 흘러 떠가는 방향이 너무 일정해서 나 스스로 두려움에 싸이곤 한다. 나의 몰입은 폐인으로 가는 입구다.
그래서 절제가 필요한 지금 나를 붙잡고 다독이며 이 글을 쓴다. 나는 내 팔목을 가로채 잡는다.
무명 주제곡을 부른 왕이보는 모형틀로 찍어낸 것처럼 매끈하게 생겨서 내 타입은 아니지만 노래하는 목소리는 안간힘으로 참아내는 통증과 연약함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영화 곳곳의 그의 설익은 풋풋함과 잘 어울린다. 가끔 ost를 듣는다. 이제는 담담하게 듣으려고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