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수공원 Feb 13. 2024

무권리 양도

#라라크루 화요일 글쓰기 주제 - 주방용품

모든 주방용품을 무권리로 양도한 지는 꽤 되었다. 그래도 주방을 지나다닐 때마다 나의 습관이 여전히 배어있는 주방기기들을 보며 슬쩍 웃음 짓곤 한다.


모든 동선을 고려해서 효율적으로 배치해 둔 전자레인지, 커피포트, 요거트 제조기는 일렬로 주르륵 디귿자 작은 주방의 가장 안쪽에서 나를 배려하며 웃고 있다.


따뜻한 라떼를 위해 우유를 데우고, 진한 커피를 내리고, 깍둑썬 사과에 요거트를 듬뿍 넣어 하루의 끼니를 시작하는 노동을 이제는 내가 하지 않는다.


우유의 온도가 미지근해도, 커피의 농도가 맞지 않아도, 깍둑 사과의 크기가 고르지 않아도 괜찮다. 이미 모든 용품과 기술을 무권리로 양도했으니 주는 대로 조용히 마시고 먹고 사라진다.


요즘 자주 사용하는 주방용품은 야채를 씻을 때 커다란 보울과 콩깍지나 브로콜리를 데치는 전자레인지, 과일을 말리는 건조기다. 내가 페스코 베지 선언을 한 후 나를 위한 샐러드가 다채롭게 추가되어 바쁜 주방용품이 더 늘었다.


커다란 도자기 접시에 수려한 연둣빛의 로메인과 양상추, 콩깍지, 말린 바나나, 말린 파프리카, 올리브는 자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나의 최애 샐러드다. 나는 보통 드레싱을 올리지 않지만 가끔 오리엔탈이나 발사믹 오일을 다.


포크와 나이프를 우아하게 들고 앉아 러드를 처음 먹는 사람처럼 신기하고 행복한 눈빛을 쏟으며 기쁘게 먹는다. 그 벅참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때론 이가 빠진 머그컵에 커피가 나와도 내가 좋아하는 기다란 손잡이의 쎅쒸한 포크가 아니어도, 너무 말린 바나나가 끈적끈적 이빨 사이에 끼어도 나는 불평하면 안 된다. 왜냐면 내가 주방과 이별했던 바로 그날부터 모든 주방기기와 요리 기술에 대한 참견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주방이 있는 이 집에서 내가 떠나는 날이 온다면, 내가 가장 아끼는 주방용품 중 하나인 조셉 저울을 반드시 훔쳐갈 거다. 그리고 힘을 더 많이 길러서 냉동고도 훔쳐가고 싶다.


나는 지금 기쁘게 감사하면서 사는 중이다.



#라라크루 (1-4) #라라라라이팅 - 나를 위한 주방용품으로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 오퍼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