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눈빛과 아이들만의 여유가 필요해요
나의 영어 교실에는 아주 다양한 아이들이 온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아이들만 받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아쉬움이 있다. 아픈 아이들이 점점 늘어난다. 외로운 아이들이 늘어난다. 말을 하지 않는 아이들이 슬픈 눈으로 바라보기만 한다.
부모가 된다는 건 세상을 짊어진다는 것이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이다. 과학과 경제의 숫자세기에 바빠 가정에서 제대로 돌봐져야 하는 것들이 자꾸 외부로 쏟아져 길을 잃는 모습에 좌절한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면 누군가 반겨주는가?
아이들이 나갈 때 들어올 때 눈 맞춰 주는가?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허락하는가?
아이들의 잦은 짜증에 같이 짜증내진 않는가?
아이들이 외로운 순간에 부모는 어디 있는가?
내 일에 바빠 내 아이를 그렇게 돌보지 못했던 위태로운 순간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엄마, 제가 외로운 거 같아요.' 할 때 아이의 눈을 보았다. 여러 날들을 눈물을 가득 채운 채 울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는 아이와 함께 울었다.
내가 그때 내 아이를 있는 힘껏 꼭 안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때 내 아이의 눈에 가득 찬 눈물을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나는 최고의 엄마는 아니었지만 아이가 원하는 것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고 살았다. 그렇게 아이는 자신이 원하던 사람이 되었다.
아이들이 부모들의 등을 보고 산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지인의 아이가 식사를 하면서도 휴대폰을 눈에 대고 있어 한 마디 하니, 먹고 보고 듣는 기쁨을 모두 즐기는 시간인데 왜 못하게 하냐는 답을 돌아왔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을 때, 내가 어떤 이야기를 했어야 할까 생각해 본다. 가족이 함께하는 좋은 습관도 시행착오를 거치며 천천히 자리 잡는다.
크리스마스 활동에서 '요즘 무엇을 제일 하고 싶나요?'라는 질문에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잠을 자고 싶어요.'라고 말할 때, '엄마 아빠가 없는 곳에 살고 싶어요.'라는 중학교 2학년 아이를 마주할 때 몸과 마음이 다 떨렸던 시간을 기억한다.
수업하다 뛰쳐나갔던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반항하던 두 팔을 잡고 앉아 눈을 맞추었을 때 아이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보았을 때, 그 아이의 첫 신경정신과 상담을 예약했노라 엄마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 상담이 아니라 엄마 아빠 눈 맞춤과 한 마디 따뜻한 말이 절실하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나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심리검사는 보통 자기 보고식이다. 아이가 제대로 하지 못한다 판단될 때는 부모가 아이의 심리검사를 하게 된다. 심리검사는 약속 잡아서 덜컥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준비될 때 하는 거다. 특히 학력이 높은 부모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선으로 자신들의 개입이 가능한 만큼만 심리검사 결과를 나오게 할 수 있다.
나의 임상심리 슈퍼바이저는 학력과 재력이 높은 부모의 아이들이 심리 및 발달 장애가 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으며, 모든 것을 쉬쉬하며 집으로 개별 상담사를 채용하여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한다며 한탄하곤 했다. 부모와 집안의 온도가 변하지 않으면 아이들의 변화는 매우 미미하다.
집안에 우울 병력이 없는데 아이가 짜증을 잘 낸다거나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작은 일을 참지 못하거나 배나 머리 또는 허리가 아프다고 칭얼대고 불평하는 일이 잦아지거나 행동이 느려지고 말수가 줄어 조용해지면 아이에게 더 집중해서 살펴야 한다. 아이가 조용해지니 문제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울증이나 무기력에 빠져 마음을 더 닫을 수 있는 위급한 때 일 수 있다.
가정 내의 온기가 항상 먼저다. 집안의 온기는 사람이 만든다.
아이들이 너무 여유가 없다. 부모의 의심과 비교와 대화 없는 허망한 기대에 아이들이 아프다. 두통에 복통이 잦아 신경과 내과를 돌다 결국 신경정신과에 접수했다는 연락을 꽤 자주 받는다. 나는 주기적으로 좌절한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최근의 나의 불안과 다짐을 글에 잡아둔다. 아이들을 만나는 한 나는 아이들에게 계속 속삭일 것이다.
얘들아 힘들면 얘기해,
선생님이 도와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