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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Apr 13. 2024

점(·)과 선(―)의 대화( II )

[엽편소설] 몽상(Right) vs. 지금(Right Now)

'보이는 것만으로 시작할 수는 없어.'


점(·)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매혹되고 끌리는 건 눈에 들어오는 그 실체라고 믿었다. 거기로부터 온도가 오르고 생명이 시작되는 거 아닌가.


'그림의 여백 같은 거야. 색깔이 없는 공간에서 시간의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거지. 없는 줄 알지만 사실은 타들어가는 것 같은 그리움은 그렇게 텅 빈 것만 같을 때 생기니까. 어때?'


꽤 오랫동안 작품에 영혼을 들이붓느라 선(ㅡ)의 존재가 희미졌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모든 키를 다 쥐고 있었다. 적어도 점(·) 그렇게 생각했다.


선이 결혼했을 때 점(·)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섹스를 하는지. 선은 어쩐지 그것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몽상가처럼 자기 세계를 가지고 사람들과도 일반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것을 어려워했던 선이었다. 그래서 결혼한다는 자체도 어색하게 들렸는데 게다가 섹스라니.


그런데 이상한 건 선이 대답을 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였을까.


히 눈물이 꾸역거리는 날에는 영낙없이 선(ㅡ)이 그리웠다. 그녀의 사람이 그리웠고 그 사람과의 대화와 섹스가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


'왜 지금(Right Now)인 거야?'


스킨십은 찰나니까. 선(ㅡ)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 찰나를 위해 서성거리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을 하고 더듬거리며 살아간다고 했다.


'하지만 가치가 없진 않아. 내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긴 쾌락을 폄하할 자격은 없으니까.'


선(ㅡ)의 '지금'은 그런 긴 쾌락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 곁에 있을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차분히 그렇지만 표정은 상기되어 안달하듯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녀는 이야기하는 시간보다 이야기하지 않고 멍하게 어딘가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멍한 순간에 그녀가 원하는 말들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점(·)에게 실체는 오직 선(ㅡ)의 입술을 통해서였다.


오늘은 꼭 전화를 해서 선(ㅡ)에게 대답을 들을 작정이다. 점(·)이 해보지 못한 선(ㅡ)의 해봄에 대해서 말이다.


"난 어떻게 시작하는지도 모르겠어."


점(·)은 선(ㅡ)의 그 시작이 궁금했다.


"한강이었어."


이게 대체 적절한 대답인 건지 혼란스러웠다. 한강에서 첫 섹스를 했다는 건가. 그럴 수 있는 건지 한강을 생각하는데 선(ㅡ)이 말했다.

 

"물은 사람을 흐르게 해. 마음도 흐르게 하고 몸도 흐르게 하지. 서로에게 다가가게 만드는 거야. 우린 그때까지 손도 잡아보지 않았어. 그냥 내가 그의 어깨에 기댔지. 정말 평소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흐르는 물을 보면서 그에게 다가가고 싶었던 거 같아. 그는 가만히 내 어깨를 손으로 당겼어. 그때였던 것 같아. 하나가 되는 그런 느낌 말이야. 차가운 새벽바람 속에서 둘이 뜨겁게 하나가 되는 거야."


점(·)은 놀림을 당하는 것 같았다.


"뭐라고? 그게 뭐야? 그냥 스킨십 같은 거잖아."


예상하던 격정과 구체적인 행동의 자극들을 기대하던 점(·)은 선(ㅡ) 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게 대체 뭔지 더 듣고 싶었다.


"그렇게 기대어 있으면 서로 점점 뜨거워지는 게 느껴지지. 심장이 터질 것 같고 기절할 것 같아서 머릿속이 멍해지는 거야. 그때의 그 온도가 나의 첫 경험이야. 심장이 멎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가 내 어깨를 돌려 마주 보았을 때 나는 깨어났어. 이상하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집으로 와버렸어."


선(ㅡ)의 지금(Right Now)은 당황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선(ㅡ)의 그런 솔직한 경험과 느낌을 알게 되면서 그런 순간을 선(ㅡ)이 항상 먼저 느끼며 주도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그럼 진짜 그런 섹스는..."


점(·)은 왠지 자신이 너무 속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들이 무척 궁금했다.


"그런 섹스는 지금(Right Now) 시작해. 하지만 보이는 것부터 시작하진 않아. 언제나. 퇴근해 오면 바라보는 순간의 갈증, 다독이는 손길에서 느끼는 다정함, 대화하며 깔깔 웃다가 눈이 마주치는 농담 같은 순간에, 기뻐서 축하하며 서로 안고 가볍게 입 맞추다가 그런 순간으로 이어지는 거야.


나의 슬립 끈이 내려가는 순간부터 지금(Right Now)의 내밀한 본능이 떠오르는 거야. 그럼 그냥 시간을 그대로 두면 되는 거지. 어디서 시작한 건지 어디서 끝이 날 건지는 누구도 모르니까. 가장 가까울 수 있는 거리로 깊고 뜨거워지는 거야.


난 나랑 반대의 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본능을 타고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마치, 좀 우습긴 하지만, 동물의 수컷처럼 말이야."


점(·)은 마음이 털썩 내려앉았다. 결국 그녀는 모르는 거였다. 사람이 없으니 결코 모를 일이 되는 거였다. 마음이 통하려면 사람이 있어야 하고 몸까지 통하려면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였다.


선(ㅡ)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정말 와인동호회라도 들어가야 할까 슬쩍 그런 생각도 했다. 그 신비한 세상의 실체가 여전히 없는 한, 점(·)도 그 없음의 상태를 인정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흥미롭게 기억되는 선(ㅡ)의 이야기가 있다.


섹스의 시간은 동그란 삼각형*에서 시작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양을 이루는 것 중 가장 날카롭고 자극적인 삼각형이 원 안에 숨어있다. 시간이 더 진해지지만 깊고 가까워질수록 그 삼각형은 자연스럽게 다각형으로 진화하면서 결혼이라는 원의 부드러운 수많은 꼭짓점으로 두 사람을 뜨겁게 이어준다는 것이다.



*: 영화 '라스트 썸머'의 동그란 네모에서 아이디어를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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