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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Apr 04. 2024

점(·)과 선(―)의 대화( I )

[엽편소설] 몽상(Right) vs. 지금(Right Now)

나이 사십이 넘었는데도 섹스 한번 못해봤다는 (·)푸념은 늘어진 햇살에 지루하게 앉아 이어폰을 휴대폰에 꽂고 통화를 하던 선(―)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이 씨, 그게 내 탓이냐?


"내가 뭐가 모자라니? 열심히 산 죄 밖에 없다고, " 


점(·)의 목소리가 풀 죽어 건너왔다.


"열심히 살았다며, 그게 왜 죄냐?" 


귀에 딱지가 앉겠다는 듯 귀찮게 대꾸하며 (―)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이 눈치채지 못하게 꾹꾹 참고 있었다. 예술한다는 사람의 저 본질적 자기부정이 예술로 승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죄로 생각하는 것도 예술로, 섹스리스로 살아온 것도 예술로. 그게 예술가 아닌가.


지루한 대화로 시간 낭비하기 싫은 (―)은 어서 결론을 내주고 전화를 끊어야지 했다.


"지금 뭐가 필요해? 대화? 사람? 섹스?" 너무 도발했나 은근 걱정을 하며 수화기 너머 (·)의 반응을 기다렸다.


"사람이 없으니 대화도 없고 섹스도 없어."


"그래, 섹스가 없으니 대화도 없고 사람도 없을 리는 없으니까."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서 얼른 혼자 하던 말놀이를 거두려고 하는데 갑자기 흥분된 (·)의 목소리가 쨍쨍 울려왔다.


"아! 그래, 난 어쩜 새로운 경험이 필요한 건지도 몰라. 대화도 해봤고 사람도 만나 봤고..." 


대체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 사람을 만나보라는 거였는데 지금 딴 데로 주제가 새면 전화 끊을 기회를 놓쳐버릴 거라는 조급함에 선(―)이 점(·)을 막았다.


"아니, 되지도 않는 생각 말고 일단 사람을 만나. 주위에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가서 만나자고 해!"


"전혀! 없어! 다 예술한답시고 초점 없이 황홀하게 떠도는 영혼들이라 닿으려 해도 안돼."


그게 예술가 아닌가 너도 그렇잖아라고 말하려다가 선(―)은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럼 인터넷 검색해서 와인 동호회라도 가입해! 사람을 만나는 거야."


"아니,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라니까! 새로운 거, 낯선 거, 경이로운 거, 그런 거 말이야. 그리고 시간도 없어. 작업할 시간도 없는데 동호회라니, 비현실이야."


아후, 드디어 또 시작이구나. 


(―)은 영혼과 시간을 수묵의 점과 선에 한 평생 고고한 바른 자세로 차분히 쏟아온 점(·)에게 선(―)의 사람과 대화와 섹스에 대해 고스란히 다시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한 작품이 수천만 원에 팔려도, 가끔 방송에 나와 평화로운 웃음과 도가 튼 것 같은 미소로 인터뷰를 하면서도, 현실에서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지독한 갈증으로 선(―)의 시간을 정기구독하고 있었다.


선(―)도 그걸 알고 있었다. 전화를 일찍 끊긴 틀렸다고 생각하자 차라리 마음에 평화가 왔다고 꾸역꾸역 자기 합리화를 했다. 점(·)도 자신의 시작이 거부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둘은 공생관계인 것 같았다.


"넌 사람이 있다며? 영혼을 맡기는 몽상(Right)이랑 뜨겁게 겪는 지금(Right Now)이라고 했던가?"


"응." 


마치 처음 듣는 얘기처럼 점(·)의 목소리가 들떴다. 리클라이너 소파에 푹 들어앉아 족히 두 시간은 걸릴 선(―)을 몇 번이고 다시 듣고 싶어 하는 점(·)을 때론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시간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라고 소리쳐주고 싶었지만 점(·)에게로의 이상한 끌림은 지근한 통증이 되고 동정이 되었다. 


"몽상(Right)에 대해 얘기해 줘." 


수화기 너머 점(·)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때일 것이다. 


"그를 만난 건 프랑스 북부의 큰 성이었어. 관광객이 많은 곳을 피해 한적한 곳을 혼자 걷고 있었어. 작은 시냇물, 바람이 가볍게 불고 비현실적인 행복감이 들었어. 오래된 나무 벤치에서 머리를 뒤로 젖히고 햇살을 정면으로 맞고 있었어. 그때 그가 왔어."


"오, 그가 서 있었어? 아니면 옆에 바로 앉았어?"


한참 서 있다가 옆에 앉았으니 그냥 한참 서 있었다고 말할까. 마음이 프랑스로 다다르자 그때의 느낌이 그대로인 것 같았다. 


"한참 서서 내 얼굴을 보려고 기울이다가 눈이 마주쳤어. 그런데 난 어색하지 않았어. 서로 마주 보고 웃었지. 처음 본 순간에 마주 보며 서로 웃고 있었어."


“그가 뭐라고 했어? 첫마디가 뭐랬더라…”


“곧 죽을 거라 했어. 그것도 그렇게 따뜻하게 웃으면서 말이야. 오래 기다려온 것을 반기는 듯하는 그를 들으며 나도 편하게 쉬는 거 같았어, 죽음이라는 말로 처음 만나다니.”


“아, 아름다워. 죽음이라니!”


예술하는 점(·)의 살얼음 같은 낮은 탄식이 선(―)을 헤집었다. 항상 그 지점에서 그랬듯이.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프랑스 북부에서 바로 그 시간에 그를 만나 죽음을 건네받았지. 나는 이상하게도 그걸 그냥 받아들였어. 우린 모두 죽으니까.”


받아들였다는 그 부분에서 점(·)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잡았어?”


바로 그 말, 묻는 말도 억양도 어쩌면 저렇게 똑같을까. 점(·)은 스킨십을 시작하고 싶어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시간에 대해 점(·)이 애를 끓이며 좋아한다는 것을 선(―)은 알고 있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그냥 느꼈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장 가까이 있다는 걸 말이야.”


점(·)이 소리를 지를 차례였다. 


“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서로 마음이 통하면 가까이하고 싶잖아. 만지고 싶잖아. 하나가 되고 싶잖아! 아악, 그럴 순 없다고!”


제대로 된 스킨십 한번 해보지 못한 점(·)은 선(―)을 통해 그 극도의 목마름을 해소하고 싶어 했지만 인생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익숙하지 않은 낯선 시간을 채우고 사는 선(―)을 부러워하는 점(·)이었다.


“그가 아프다고 했지? 시한부라고?”


“응, 프랑스 그 벤치에서 그는 나에게 일 년쯤 남았다며 여행 중이라고 했었거든. 한참을 그냥 같이 앉아 있다가 내가 먼저 일어났어.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고 그와 악수를 했어. 내 손이 따뜻하다고 말하더라. 난 한국에 돌아왔어. 그리고 다시 그를 만난 거야”


“이제 뜨겁겠군.”


점(·)이 어떤 세상에서 사는지 알 길은 없었다. 예술가니까 좀 다르려니 하지만 상상과 비현실이 초현실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여러 번 얘기했는데도 새로운 스토리를 기대하는 것처럼 안달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종종 만나러 가. 그가 어디론가 떠날 때 장소나 시간을 알려주면 내 시간이 될 때 마주치러 가는 거야.”


“마주친다고? 만나면 꼭 안아줘야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점(·)이다. 


“시간이 많으면 벤치에 앉아 오래 이야기도 하고 같이 밥도 먹어. 바라만 봐도 기쁨이 되는 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어떻게 바라보기만 해? 어떻게?” 


점(·)은 코까지 풀어가며 맘 놓고 흐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없을 때는 그가 알려준 장소와 시간을 헤매다가 내 자동차로 그를 그냥 지나쳐 오기도 해. 백미러에 길을 걷고 있는 그가 멀어지는 걸 보면 엄청난 통증이 밀려오지. 그래도 그게 우리를 허락하는 최선의 순간들이라는 걸 아니까.”


이쯤에서 점(·)은 폭풍 오열을 하고 선(―)은 한동안 달램의 미덕을 한껏 발휘하곤 했다. 이제 아름다운 몽상(Right)의 시간이 끝날 것이다.


“나는 종종 그를 만나는 시간을 하나씩 내게 담으며 살아. 우리의 악수가 영겁을 쌓아주지. 그가 나의 생명이 되었어. 그가 나의 사는 이유가 되었어. 아마 그가 나의 죽는 이유도 될 것 같아.”


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파에 푹 꺼져 앉아 있을 것이다. 섹스라는 채움이 없어도 살아가는 이유가 된 선(―)의 그 사람 이야기는 한동안 점(·)을 평온하게 할 것이다. 그가 선(―)에게 온지 오년이 되었다. 그가 선(―)의 친구인 점(·)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가끔 들이닥치는 폭풍우처럼 점의 모음으로 사는 친구에게, 사람을 이으며 선처럼 사는 그녀의 이야기는 꽤 오래 위안이 될 것이다. 


이다음에 울먹거리는 점(·)의 전화가 오면 그땐 뜨거운 지금(Right Now)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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