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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Jan 07. 2024

매년 1월 31일

[엽편소설] 판타지 독서 모임, 커피문고

그 시간 거기엔 원래 아무것도 없다. 벌써 125년째다. 매년 그날이 되면 내가 일 년 동안 살았던 가장 편한 모습으로 그곳에 간다. 오늘이 그날, 2149년 1월 31일이다. 나의 안내견이 나를 재촉한다. 우리가 다 모이면 커피문고가 모습을 드러낸다.


2024년 1월 31일, 모임의 끝이 되었다가 시작이 된 날, 나의 끝이 시작이 된 날이다. 앞으로 일 년은 무엇으로 살까. 커피문고에 도착하니 흰색 자동차가 유리에 비친다. 누군가 벌써 왔나 보다!


멤버는 네 명이다. 우리가 지난 일 년을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으로 살았는지 단 하루 1월 31일 저녁에 모여 나누고, 지난 일년과는 다른 사람, 다른 직업, 다른 성일수도 있는 다음 삶을 위한 책을 한 권씩 준비해서 원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떠날 뿐이다.


우리가 힘주어 문을 열지 않아도 우리를 반기는 곳, 투명한 통유리창 너머 한쪽벽 책들이 우리를 여전히 기다리고 네 명이 아담하게 앉을 동그란 원목 테이블과 의자도 그대로다.


우리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나면 마지막에 헤어졌던 우리의 그 모습 그대로를 기어코 드러내고 만다. 세상에 단 하나 오롯한 생명의 장소다. 우리는 손잡고 안아주며 눈을 보며 기쁘게 환호한다. 여명이 오기 시작하면 각자 다시 떠나야 한다.


하얀색 자동차를 타고 온 민주, 다정한 아빠였던 준희, 작가로 살았던 동주, 그리고 단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두 눈을 포기했던 내가 다시 만났다.


민주는 자유는 달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했다. 때로는 멈추고 밖을 내다보면서 아침 이슬을 머금을 풀포기에 가련한 마음을 갖는 것이 자유라고 했다.


그래도 누군가 보고 싶을 때 그를 향해 달려 그와 만나든 그를 먼발치에서 보고만 오든 닿을 수 있는 곳에 훌쩍 떠날 수 있는 것은 살아있는 뜨거운 심장을 느끼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녀는 세상을 사랑했고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알았다.


가장이라는 무게의 아버지를 내리고 언제나 다정한 아빠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했다. 준희는 하루의 걱정과 책임으로 둔갑한 무거운 마음을 현관 옆 은색 철제 우체통에 쏟아 두었다고 했다.


걱정 우체통에 삶의 무게를 가득 쏟아내고, 밝게 한껏 웃으며 집에 들어가 뛰어 안기는 아이들 볼에 키스하고 미소 지으며 반기는 아내와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그게 행복이 아니겠냐고 말하는 준희였다.


작가였던 동주는 매일이 좌절이었으며 힘겨웠다고 했다. 글을 쓰는 일은 진심으로 원하던 것이었지만 글을 쓰는 일은 잡히지 않는 공기와 같아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원하던 것들이 진심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의 고통은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다며 마치 정말 다 타버리기라도 한 듯 가슴을 쥐고 한탄했다.


어디에서 그 고통이 끝나려는지 그걸 알 때까지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가련한 동주였다. 하지만 단단한 동주였다.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했었다. 나는 그 단 한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 내 두 눈을 포기했었다. 그가 나를 알아볼 때 그 앞에서만 눈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었다. 나는 그게 집착임을 깨달았다. 좌절한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눈물로 흘렀으며 더욱 캄캄한 어둠 속에 나를 묻었다.


그는 내게 왔었다. 어느 지하철 역에서 내 안내견을 쓰다듬던 한 사람이 눈에 보였다. 파란색 운동화를 보았다. 내게 책을 읽어 주었던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내게 별을 사랑한 청년 이야기를 해주고 그 책을 내게 주고 떠났다. 나는 책을 모두 읽었으며 책이 그였음을 알았다. 그가 별을 사랑한 청년이었음을 알았다.


이내 나는 안내견이 다시 필요했다. 그가 별에 닿지 못하고 나를 떠났다는 것을 느꼈다. 내게 깨달음을 주고 갔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가슴으로 느끼는 묵직한 그 빛을 끝까지 잡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어둠 속 하나의 불 빛 안에서 지나온 일 년에 웃고 울었으며 각자 준비한 책에서 다가올 일 년, 다른 삶을 가늠해 내었다.


그 일 년을 최선을 다해 느끼고 고뇌하며 살아내고는 다시 다음 해 1월 31일 어둑한 저녁이 오면 우리의 처음과 끝이었던 이 커피문고에 와서 살아온 삶의 온기를 나누고 새로운 삶의 모험을 떠날 것이다.



누군가의 책 속에 이런 문양의 북마커가 꽂혀 있다면 그는 내가 126년째 커피문고 모임에서 만날 사람이다.




독립서점 '커피문고'가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제 1월 6일(토) 저녁에 잠시 다녀와 밤새 뒤척이며 저 또한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인 것을 우리 모두 압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starry-garden/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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