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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Sep 13. 2023

불가리 아메시스트 (3-3)

초단편소설 [최종회]

인서는 수완나품 공항에 내려 커다란 캐리어를 맡기고 노트북이 든 가방만 들고 방콕 시내로 향했다. 한국행 비행기는 아직 9시간이나 여유가 있었다. 한국 가면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를 아직 채 마무리를 하지 못해 시간이 필요했는데, Fred는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자기 집에 와서 마무리를 하라고 했다.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아 다시 나가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Okay, thanks.'


택시에서 인서가 내린 자리에 Fred가 서 있었다. 여전히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맞아 주는 Fred 옆에 앞으로도 계속 인서가 서 있으면 어떨까 잠깐 생각했다. 그게 불가능한 걸까.


"How was your trip? Wasn't it tough?"


"The flight was nice. People were kind. I was in great pleasure coming to see you."


오는데 고생하지 않았냐는 Fred의 질문에 인서는 그를 보러 오게 되어 신났었다는 말을 멋쩍게 했다. 그의 집은 조용한 주택가 2층이었는데 침대가 있는 방 옆의 유리문을 여니 가로세로 5미터쯤 되는 작은 수영장이 전혀 어울리지 않게 들어 있었다. 그것 때문에 그 집을 얻었다고 했다. 햇빛이 물에 비쳐 반짝이며 흔들거렸다.


물에 들어가 놀아도 되고 피곤하면 침대에서 자도 된다고 했다. 보고서가 꽤 시간이 걸릴 거라 말을 하니 인터넷이 연결되는 동그란 작은 기구를 노트북에 달아주었다. Fred가 돌아오면 같이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다. Fred가 나가고 혼자 남으니 이상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런 생활은 꿈인 걸까.


자원봉사 영어 선생님으로 평생을 산다면 인서의 꿈을 이루며 사는 것이기도 하다. 큰 세상에서 더 크고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도와주는, 그런 실체적인 일을 하는 인서의 모습을 스스로 얼마나 꿈꿔왔던가. 자동차가 없어도 이젠 자전거도 제법 타고, 욕심내지 않고 허락되는 시간과 공간에 감사하며 살면 될 일이었다.


화려한 백화점 꼭대기의 레스토랑에는 의외로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자 Fred는 인서에게 메뉴를 펼쳐 음식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으며 설명해 주었다. 비위가 약하니 이게 좋겠다 소화가 잘되는 시금치 수프가 괜찮은데 먹어 볼까. 조곤조곤 예술 작품을 설명하듯이 음식을 설명하는 Fred를 보며 인서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I'm allergic to American spinach. Funny, isn't it? Asian spinach varieties are all okay for me."


묻지도 않았는데 미국 시금치에 알러지가 있어서 호흡곤란이 온다고 했다. 이곳 시금치는 괜찮다며 시금치 수프를 좋아한다고 했다. 인서는 짙은 초록색의 시금치 수프가 처음이었지만 살짝 맛본 첫맛은 마치 양송이 수프 같은 묵직한 질감이어서 입맛에 잘 맞았다. 잘 먹는 인서가 신기했는지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Fred에게 인서도 어색한 미소를 보냈다.


그냥 머무르고 싶다고 말할까. 이제 5시간 남았어. 인서의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보다 눈물이 더 먼저 터질 것 같았다. 자리를 옮겨 야외 카페로 나가 Fred는 맥주를, 인서는 탄산수를 주문했다. 끓어오르는 탄산수 방울처럼 마음이 끓어올랐다.


"Fred... I would like to stay here if you would allow me to. I can do what I have done before, such as teaching English and handling document-related tasks, among other things. Could you please let me? In fact,... I simply want to stay with you."


하던 일 계속하면서, 아니 다른 일도 해도 좋다며, 같이 있고 싶다고 말을 해버린 인서는 스스로도 자신의 무모한 용기에 당황스러웠지만, 떠나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를 간절히 잡아보고 싶었다. 시선을 떨구고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묵직한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다.


"Inseo... You've considered me a lifeline here since I'm the only one you've communicated with. Now, you're returning to your comfort zone, to the place you should stay in Korea. Thank you for saying that to me, but I can't guarantee anything to you. It's okay for you not to stay with me. I'm fine. I will be fine."


자기는 힘든 곳에서 유일하게 인서와 소통하던 생명선 같은 거였다며 이제는 인서가 있어야 할 편안한 한국으로 돌아가라 했다. 고맙지만 같이 있어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인서의 Please... 에 Fred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오랫동안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더 이상 처절한 애원도 바람도 필요 없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한 달 후쯤 돌아와도 좋다고 했다. Fred에게 인서는 더 이상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택시를 잡아 기사에게 태국 말로 뭐라 일러주고는 Fred가 팔을 벌렸다. 힘껏 안으며 Fred의 등을 다독이며 나직이 말했다. 'I'll come back. Wait for me, please'  수완나품 공항으로 가는 택시가 인서의 눈물로 가득 찼다.




인서의 삶에 대한 여러 가지가 결정되었다. 실행만 하면 된다. 공항에 인서를 픽업하러 나온 남편은 인서의 눈을 멋쩍게 맞추고는 운전을 하는 동안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인서는 벌써 뭔가 말을 전했던가 생각했다.


집에 와 짐정리를 하면서도 조용하고 냉정해 보이는 인서의 분위기에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남편도 조용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 일주일 후부터 인서는 꿈을 꿀 때마다 도살장이 있는 그곳을 맨발로 헤매며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독한 썩은 냄새도 이제는 나지 않았다. 인서가 가야 할 곳, 여전히 불가리 아메시스트가 흠뻑 남아있는 그곳에 꼭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잠에서 깼다.


주방 냉장고에 기대어 한참을 서 있다가 어둠에 익숙해지자 남편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새벽 4시, 그가 깰 시간이 아니었다.


"난 괜찮아.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그러면 나도 행복하니까. 네가 어디에 있던지 네가 살아 행복하면 나는 정말 괜찮아. 그러니 편안하게 마음 가졌으면 해."


화를 내야지. 당신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다 눈치챘으면 원망하고 붙잡고 흔들어야지. 참 나쁘다고, 참 못됐다고. 그래야 내가 독하게 돌아서서 편하게 갈 수 있는 거잖아. 내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거지? 그렇지? 맞지?




"엄마! 엄만 아빠가 어디가 좋아? 아빠는 엄마가 좋대. 그냥 바라만 봐도 좋대요! 얼레리 꼴레리!"


인서는 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갈 수 없었다. 이 사람을 두고 돌아가면 스스로 도살장으로 자신을 처박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곳에 남은 불가리 아메시스트는 그곳의 향기로 남겨두기로 했다. 10년 전 그대로.


펄쩍펄쩍 재잘거리는 아이를 안고 남편이 인서를 바라보고 있다. 따뜻한 눈물을 가득 채우고 눈부시다는 듯.


- 끝.



사진 Thomas_Pixabay

마음에 남은 눈을 치우는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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