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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Sep 11. 2023

불가리 아메시스트 (3-2)

초단편소설

향기는 거기 그대로 있겠지.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다른 자원봉사자들의 의도적인 웃음소리 사이에서 못내 같이하지 못한 불가리 아메시스트를 떠올렸다.


"What's wrong? Are you okay?"


Fred는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인서를 살폈다. 첫날이니 더 신경 써주는 것 같았다.


"Oh, sorry. A bit sick. I need some fresh air..."


저녁을 먹다가 핑크빛으로 접시에 올라앉아 있는 고기 덩어리를 보자마자 눈물이 울렁임과 같이 올라왔다. 잘 보낼 수 있을까.


향이 없는 그녀는, 입고 있던 가죽 재킷이, 그 안의 블라우스가, 그리고 그 안의 브래지어가 모두 투명이 아닐까 갑작스럽게 당황해서 내려다보았다. 벌거벗은 향기를 참을 수 없었다.


지독한 썩은 냄새를 풍기는 그곳은 slaughter house라고 했다. 번화한 곳 바로 옆에 도살장이 있다니 두 달간의 평화 따윈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스멀거렸다.


긴 원목탁자와 인서의 향기가 기다리는 별채를 열자마자 천국을 느꼈다. 탁자에 걸터앉았다가 옆으로 누워 불가리 아메시스트가 산산이 깨져버린 그 바닥의 회색 얼룩을 부러워했다. 그 얼룩 위로 '띠링' 소리가 나서 눈을 떴다. 한 시간은 족히 잠들어 있었구나.


인서는 휴대전화의 작은 창으로 보이는 알림 신호에 첫날 첫 메시지를 확인했다. 'I've been worried. Are you feeling better now?' 컨디션이 나아졌냐는 Fred의 메시지가 타국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안도로 느껴져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Ok, thx. CU2moro.'


다음 날, 커다란 주택을 개조한 NGO 사무실에서 Fred와 미팅을 하기로 했다. 자원봉사자들에게 지급되는 유일한 교통편인 자전거를, 길가 튀어나온 돌에 올라 간신히 타고, 40도에 가까운 열기를 뚫고 사무실에 도착하여 헉헉대고 있었다.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들으면서 귓속이 윙윙거렸다. 열이 인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았다.


"Hey, Inseo! Inseo! Oh, my! Please... Help!"


눈을 뜨자 싼이 걱정스러운 듯 인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과 이마에 얼음팩을 두르고 누워있던 인서가 일어났다. 괜찮냐고 묻는 싼에게 희미하게 웃음으로 답하고 두리번거리며 Fred를 찾았다. 두통이 여전했다.


"He's left for Bangkok. He has a meeting there."


방콕으로 회의차 떠난 Fred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굳이 언제 돌아오는지 묻지 않았다. 학생들에 관한 정보가 든 서류를 받아 들고 별채로 돌아왔다. 당분간 싼이 라이드를 해주겠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 지글거리는 땡볕에 더위 먹은 자원봉사자를 위한 최고의 배려였다.


수업 전날 싼이 Fred와 같이 별채로 왔다. 난민 캠프의 사령관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도착 첫날 수업을 둘러보았으면 되었지 가르치러 왔는데 왜 사령관까지 만나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게 형식적인 거라 신경 쓰지 말라는 Fred를 믿기로 했다.


어두운 1층의 시멘트 바닥 그대로의 사령관실은 음산했다. 오전 10시가 이렇게 어두울 수 있구나. 사령관과 악수를 하고 Fred의 소개에 따라 간단히 목례를 했다. 지프가 도착하고 난민 캠프를 돌며 사령관이 거들먹거리며 안내를 했다. 하나의 큰 도시였다. 슈퍼마켓도 있고 시장도 있었다. 넓적한 그릇에 비릿한 생선들이 나란히 누워 눈을 퀭하니 허공을 노려보는 게 날씨 때문이려니 했다.


입을 꾹 다물고 숨을 참는데 눈물과 울렁임이 다시 올라왔다. Fred가 옆에 있던 쿠션을 배에 안겨주었다. 딱딱한 쿠션을 위안 삼아 간신히 참아낸 덕에 사령관 앞에서 토하지 않았다.


'Are you okay?' 대체 이곳에 온 지 나흘동안 이 Are you okay?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왜 이곳에서 나는 okay가 아닌 걸까.


수업은 순조로웠지만 기후가 맞지 않았다. 며칠 동안 탔던 태국의 교통수단인 썽태우는 인서를 그대로 열기에 노출시켰다. 별채에 도착하면 불가리 아메시스트를 지나 욕실로 뛰어가 구토를 하고 비틀거리며 침대에 눕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어딘가에 연락할 힘도 없었다. '띠롱' 'Are you okay?' 눈물이 왈칵 솟았다.


"Fred, help me, please. I can't stand this heat. Please...!"


인서를 집어 삼키고 있는 열기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먼저 살아야 했다. Fred에게 혹시 렌트를 할 수 있는지 물었다. 자원봉사하러 와서 렌트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혔지만 미션은 반드시 완료하고 싶었다. 며칠간 제대로 먹은 것도 없어서 이를 악물고 간신히 버티며 무릎이 꺾이지 않도록 서서 처절하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남편은 여름밤 선풍기도 싫다던 인서가 열기 때문에 렌트를 한다니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삶이 한 바퀴 돌고 있었다.


작은 승용차를 렌트하고 오른쪽 운전석에 낯설게 앉아 차가 드문드문한 도로에서 싼이 알려주는 대로 주행 연습을 했다. 


"왼쪽! 왼쪽! 왼쪽이야!" 우회전을 해야 할 때마다, 열기로 고통스러웠던 시간 따윈 모두 잊었는지 왼쪽으로 달리는 태국의 도로를 소리 질러 익히며 인서는 자유를 느꼈다. 


한 시간도 더 달려야 하는 난민 캠프로 가는 숲길이 천국의 힐링으로 마중 나왔다. 쇼팽의 녹턴 B 플랫 마이너 op. 9 no 1의 머리 속까지 울리는 선율 속에 혼자 힐링하는 시간들이었다.


목요일이 되면 수업이 끝나고 토요일까지 주말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목요일 수업이 끝날 즈음이 되면 이상한 향수가 밀려왔다. 한국이 그리운 게 아니라 사람이 그리웠다. 가까이에는 Fred가 있었다. 외로운 무표정을 예민하게 알아채고 이것저것 해보라 권했다. 거의 문자 메시지였지만 그 메시지들이 인서에게는 Fred였다.


Fred가 난민위원회 회의로 며칠 멀리 떠나기라도 하면 'Please, bring yourself intact, ' 'Please, make sure you're whole when you arrive.' 잘 다녀오라는 메시지를 보내며 안도하곤 했다. 인서는 무엇을 물어봐도 귀 기울여주는 Fred에게 그녀의 마음을 주고 싶었다. 그가 하는 일이 점점 더 커 보이기 시작했고, 그녀가 살던 좁은 시야의 한국이 조금씩 아득해져 감을 스스로도 느꼈다.


"I've missed you a lot." 사무실에서 만나 눈 마주 보며 그의 안전한 귀환을 환영하는 단 한마디를 하며 인서는 눈물 왈칵거렸다. Fred는 그저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좋은 사람. 큰 사람이었다.


수업이 마무리되면서 가르쳤던 학생들이 난민위원회 면담을 하나씩 마치고 있었다. 곧 미국행이 결정되기도 하고 보류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인서의 모든 수업 미션은 끝이 는 의미였다.


전체 2개월간 수업 보고서를 작성해서 Fred에게 제출하고 나니, 예매해 둔 한국행 비행기 티켓이 낯설게 인서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으로 가게 되는 거구나. 아, 거기에 인서의 사람이 있다. 이곳에는 Fred가 있다. 


'띠' 'May I see you in Bangkok before you leave?' 방콕에 출장 중인 Fred의 메시지였다. 하루 밖에 남지 않았어. 단 하루.



사진 Thomas_Pixabay

마음에 남은 눈을 치우는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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