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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Sep 11. 2023

불가리 아메시스트 (3-1)

초단편소설 [시작]

인천 공항 가는 길이 낯설었다. 이 길이 맞나. 인서는 떠나는 당일에야 무엇이 준비되고 무엇이 준비되지 않았는지 허둥지둥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운 곳에서 보내야 하는 두 달인데 왜 가죽재킷을 챙겼는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여전히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불안감으로 빨간 신호에 멈출 때마다 운전대만 톡톡 두드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노트북, 어댑터, 필기도구들, 옷가지들 그리고 그녀의 탄생석을 담은 연보랏빛 불가리 아메시스트 향수를 챙겼는지 되새겼다. 인서의 생일 때마다 침대 머리맡에 남편이 조용히 두고 가던 그 불가리 아메시스트다.


수코타이 공항에 내 후텁한 기운에 숨을 훅 들이쉬었다. 에어컨에 서늘한 안쪽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진한 더위를 내뿜고 있었다. 짐가방을 찾아 밖으로 나가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훑었다. 매번 파견 때마다 익숙하게 흔드는 손 사이로 불리는, '잉써~' 여전했다.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의 순한 미소를 띤 젊은 남자가 힘차게 인서를 불렀다.  


"Hi, welcome to Thailand! I'm Sun."


"Hi, nice to meet you. I'm Inseo. Thank you for coming for the ride."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고 웰컴 악수를 나눴다. 작은 지프가 주차장에 뜨겁게 달궈져 서있다.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고 운전하는 그를 보며 이곳에서의 두 달이 잘 지나가길 바랐다.


더운 곳에 간다며 건강 조심하라는 남편에게 한번 또 신나게 모험하는 거죠 하며 호기를 부렸지만 지프를 올라타며 등에 붙는 끈끈한 뜨거움에 벌써 지치는 것 같았다.


난민들이 모여있는 곳의 규모는 인서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거대했다. 오만 명이라니 하나의 도시였다. 얼기설기 안쪽이 보이도록 만들어진 교실에는 영어를 배워 미국으로 가길 원하는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저 아이들에게 두 달간 영어를 훈련시켜 국제난민위원회와의 인터뷰를 준비해주어야 하는 임무였다.


새로 오는 선생님이 궁금했는지 아이들끼리 눈으로 수군거리며 인서를 흘긋거렸다.


"Please, look around the camp and tell me what you need. Oh, I'm Fred, the head of this Education Project."


교실 옆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데, 어느새 다가선 희끗한 머리의 남자가 악수를 청했다. 엉겁결에 악수를 하면서도 닷새 후부터 시작할 수업에 대한 계획을 머릿속으로 바쁘게 정리했다. 미국에서 가르치던 난민 이민자 아이들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지만 상황에 맞게 조정하면서 미션을 완수하면 될 일이었다.


"They look gloomy and worried. Are you?"


"Oh, I'm fine, and you?"


"I'm good."


"I'm Inseo. Nice to meet you"


영어 선생을 10년도 넘게 했는데 여전히 I'm fine, and you? 라니 더 새로운 건 없었니 하며 속으로 웃었다. 첫날이니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저녁에는 이렇게 덥지 않다면서 겉옷을 챙기라는 말도 덧붙였다. 가방 안 그녀의 가죽 재킷이 거봐라 하는 것 같았다.


공항에서 인서를 데려온 싼이 두 달간 그녀가 머물 숙소로 안내를 했다. 의미는 태양이지만 부를 때는 '싼'이라고 해달라며 친절한 웃음으로 덧붙였다.


자원봉사자들이 묵는다는 오래된 이층 목조단독주택의 별채의 문을 여니 10미터쯤 되는 커다란 원목 식탁이 세로로 눈에 들어왔다. 파티룸인가? 그 맨 안쪽에 싱글 침대 하나가 놓인 작은 방, 그리고 커다란 욕실이 딸려 있었다. 인서는 멈칫하며 한국적이 아닌 풍경에 어떻게 익숙해져야 할지 잠시 당황했다.


필요한 것도 사고 휴대전화 개통도 할 겸 지도를 펴 들고 가장 번화한 곳에 있는 대형 슈퍼 마켓, 테스코 쪽으로 걸어갔다. 심한 악취가 뿜어 나오는 곳을 종종걸음으로 지나 휴대폰 가게를 먼저 들어가 개통을 했다. 유심칩을 넣고 어떤 번호를 눌러야 국제 전화를 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바로 한국에 전화를 했다.


"잘 도착했어요. 거긴 몇 시예요?"


"6시쯤? 거긴 어때? 차는 퇴근해서 공항에 들러 가져올 거야. 아프지 않도록 주의하고."


남편은 인서가 어디로 떠난다 해도 응원해주곤 했다. 말없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어깨를 푸근하게 감싸듯 편안함을 내주는 사람, 두 달 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지만 인서의 경력에 필요하다는 말로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이었다.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그러면 나도 행복하니까."


수줍은 듯 흐린 눈웃음으로 나직이 말하는 그의 진심을 읽었다.


"잘 마치고 갈게요."


슈퍼마켓에 들어가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대강 살핀 후 탄산수와 청소 도구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가지고 온 물건들을 어디에 어떻게 정리할까 청소하는 중간중간 위치를 정했다.


가방을 열고 커다란 긴 탁자 위에 노트북과 케이블, 책들을 꺼내고 그 위에 가져온 불가리 아메시스트를 올려두었다. 옆에 세워둔 북스탠드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다 쌓아둔 책더미를 건드리자 보라색의 불가리 아메시스트 향수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 안돼..."


보라색으로 조각난 유리들이 바닥에 보석처럼 찬란했다. 불가리 아메시스트가 별채를 가득 채웠다. 한동안 멍하게 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인서의 향기를 나눌 수 없는 바깥세상, 갇혀버린 향기를 되찾으러 별채로 돌아와야만 하는 첫날이 시작되었다. 그 향기 없이 외출해 본 적 없는 인서였다.


아무런 생각도 향기도 없는 채로 멍하니 서 있는데, 싼이 왔다. 저녁 약속에 조금 일찍 가면 좋을 거라고 했다. 인서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가죽 재킷을 급히 챙겨 싼을 따라나섰다.



사진 Thomas_Pixabay

마음에 남은 눈을 치우는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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