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SNS에 능한 사람이 아니다. SNS는 Social Network Service의 줄임말이라는데 사회적 관계를 잘 못하는 나, 양심이 없는 걸까.
한 카페에서 나는, 5년이 넘도록 '구독'이라는 개념을 몰랐다. 누군가 나를 '구독'한다고 하면 속으로 '내가 신문이니?'하고 말았었다. 숫자로 표현되는 구독, 그게 마음인가, 그리움인가, 그게 요즘이구나 한다.
의견이나 경험, 관점의 공유를 강제하며 숫자 놀음을 하는 SNS에 말려들어가지 않으려고 고투하고 있다. 내가 소진되지 않을 만큼만 견뎌가며 살겠다는 의지를 확인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SNS의 숫자와 통계에 별 감흥이 없는 게, 행운인지 저주인지 잘 모르겠다. 내 영혼의 산란(散亂)을 허락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가끔 마음이 폭풍처럼 흔들릴 때가 있다. 어떤 마음이 나를 흔드는 그런 날, 그 사람을 찾아 헤매는 날이다. 그런데 허탈한 건, 내가 SNS에서 길 찾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누가 그 메시지를 보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결국 찾지 못했다.
매일 써 올리며 되는대로 채우고 있는 내 영혼의 찌꺼기 같은 글을 읽는 사람이 있구나. 화들짝 놀랐다.
누군지, 어디 있는지, 어떤 걸 읽고 이렇게 썼는지 모르는 이 막막함을 어찌할까. 어쩌면 그저 무심히 흘리고 간 메시지에 속수무책 끌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궁금하다, 당신이 읽어 낸 나의 글 어느 부분이 당신을 눈물 나게 했는지 말이다.
나는 수시로 읽다가 뜨겁고, 눈물 흘리며 쓸쓸해졌다가, 보내려는 마음을 우물쭈물 접곤 할 때가 있다. 이 글자 한 자 한 자가 마음의 무게를 더 찍어 누르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안 눌러야지 다짐했으면서도 무의식으로 누른 라이킷에 아... 탄식하는 날들, 내가 너를 읽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다가도, 문득 알리고 싶은 이중성을 무엇이라 할까.
갑작스러운 눈물의 메시지를 캡처할 수밖에 없는 이 절박함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게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다. 문 닫고 있다고 해서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니.
사실 필사한 데미안 원서의 한 귀퉁이를 굳이 읽어낸 감성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데미안은 감성보다 차가운 이성에 가까운 책이다. 거기에 나의 감성이 질척거리며 붙어 다른 흥분이나 처절함으로 변화하는 것뿐. 순간의 격정을 그대로 글로 올릴 수 없어 조금씩 감정을 지체해 두며 터진 실밥 같은 너덜거림을 덜어내는 중이다.
감정이 감성으로 표현이 가능한 날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구질구질해질까 두려운 삶이다.
오늘 겨울 한라산 산행을 시작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움에 마음 아픈 사람들, 그리고 몸이 아픈 친구들에게도 산의 힘을 전하고 싶다. 꼭 돌아오겠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내 삶은 그저 내가 묵묵히 혼자 걸어가야 할 길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