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을음, 상처였을까

10대, 풋사랑의 흔적 그리고 상처

by 희수공원

공부만 하고 싶던 나의 십대가 있었네

열심히 하겠노라 아빠를 졸라 학원에 등록했지

물리와 화학을 정말 잘하고 싶었거든

거의 혼자였던 큰 자습실의 자유 속에서

화학기호를 외우는 일은 흥분되는 시간이었어


그러다 누군가 항상 저 뒤에 앉아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거나 그림을 그리는

물리, 화학과는 너무도 안 어울리는

어떤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버렸

그림을 그릴 거면 화실에 가야지, 칫!


비 오는 날 네가 툭 내민 종이 한 장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는지 예술을 넣어

어른 같은 글씨체의 아름다운 편지였어

무표정의 나였지만 마음은 참 이상하더라

넌 그날부터 그림 한 장씩 설명해 주곤 했지


너의 그림과 글씨와 다정한 마음이 좋았지만

나는 물리랑 화학을 더 잘하고 싶었던 거야

언제나 미동 없이 곁눈으로 그림을 보고 듣고

다시 공부로 파고드는 내게 서운했는지

너는 어둑거리는 표정으로 풀썩 돌아가곤 했어


네가 안 오는 날엔 그림이 보고 싶고 듣고 싶고

화학기호가 가득한 페이지에서만 하루를 보내고

마음이 왜 이럴까 자꾸 허공으로 튕겨올라가

출입구만 흘깃거리며 마음이 허전해졌을 때

내가 아는 사람 옆에 네가 웃는 걸 봤어


나 보라고 그런 거지? 나쁜 자식!

마음을 후비는 편지는 매일 나에게 던지고

눈앞에서 알짱알짱 넌 그 사람 옆에 웃고 있고

대체 어쩌려고 어쩌자고 어떡하라고! 나쁜 놈!

물리 화학 책이 뿌옇게 젖을 때 견딜 수 없었어


네게 받은 수십 통의 편지들 다 끌어 모아서

한껏 붙들고 울고 나서 성냥을 그었어

내 눈물에 다 타지 못할까 볼을 훔쳐가며

그 편지들 다 태워서 하얀 봉투에 고이 담아

그녀 옆에 여전한 네 손에 쥐어줬어, 나쁜 자식!


나는 여전히 자습실에 독하게 혼자 앉아

세상에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듯이 공부만 했어

그을음이 가득한 편지 봉투를 전한 이후에

너를 볼 수 없었어, 그녀도 볼 수 없었어

그 이후 지금까지 너를 만나지 못했던 거야


가끔, 하나 남은 너의 편지, 남겨진 그림과 메모

나의 10대가 네게 저지른 그을음에 소스라치며

어른을 지나 글을 쓰며 마음이 몹시 힘들기도 해

잔인했던 그 시간들, 난 제대로 어른이 된 걸까

한 번은 꼭 만나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어디 있니?



네가 준 편지와 그림들

과거에 타인에게 준 상처가 고스란히 제게로 돌아와 머무는 중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