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만 하고 싶던 나의 십대가 있었네
열심히 하겠노라 아빠를 졸라 학원에 등록했지
물리와 화학을 정말 잘하고 싶었거든
거의 혼자였던 큰 자습실의 자유 속에서
화학기호를 외우는 일은 흥분되는 시간이었어
그러다 누군가 항상 저 뒤에 앉아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거나 그림을 그리는
물리, 화학과는 너무도 안 어울리는
어떤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버렸어
그림을 그릴 거면 화실에 가야지, 칫!
비 오는 날 네가 툭 내민 종이 한 장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는지 예술을 넣어
어른 같은 글씨체의 아름다운 편지였어
무표정의 나였지만 마음은 참 이상하더라
넌 그날부터 그림 한 장씩 설명해 주곤 했지
너의 그림과 글씨와 다정한 마음이 좋았지만
나는 물리랑 화학을 더 잘하고 싶었던 거야
언제나 미동 없이 곁눈으로 그림을 보고 듣고
다시 공부로 파고드는 내게 서운했는지
너는 어둑거리는 표정으로 풀썩 돌아가곤 했어
네가 안 오는 날엔 그림이 보고 싶고 듣고 싶고
화학기호가 가득한 페이지에서만 하루를 보내고
마음이 왜 이럴까 자꾸 허공으로 튕겨올라가
출입구만 흘깃거리며 마음이 허전해졌을 때
내가 아는 사람 옆에 네가 웃는 걸 봤어
나 보라고 그런 거지? 나쁜 자식!
마음을 후비는 편지는 매일 나에게 던지고
눈앞에서 알짱알짱 넌 그 사람 옆에 웃고 있고
대체 어쩌려고 어쩌자고 어떡하라고! 나쁜 놈!
물리 화학 책이 뿌옇게 젖을 때 견딜 수 없었어
네게 받은 수십 통의 편지들 다 끌어 모아서
한껏 붙들고 울고 나서 성냥을 그었어
내 눈물에 다 타지 못할까 볼을 훔쳐가며
그 편지들 다 태워서 하얀 봉투에 고이 담아
그녀 옆에 여전한 네 손에 쥐어줬어, 나쁜 자식!
나는 여전히 자습실에 독하게 혼자 앉아
세상에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듯이 공부만 했어
그을음이 가득한 편지 봉투를 전한 이후에
너를 볼 수 없었어, 그녀도 볼 수 없었어
그 이후 지금까지 너를 만나지 못했던 거야
가끔, 하나 남은 너의 편지, 남겨진 그림과 메모
나의 10대가 네게 저지른 그을음에 소스라치며
어른을 지나 글을 쓰며 마음이 몹시 힘들기도 해
잔인했던 그 시간들, 난 제대로 어른이 된 걸까
한 번은 꼭 만나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어디 있니?
네가 준 편지와 그림들
과거에 타인에게 준 상처가 고스란히 제게로 돌아와 머무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