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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Sep 21. 2023

너는 무슨 꽃이었니?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네 인생인데 왜 내가 억울한지 모르겠다. 거기서 이제는 편하게 지내는 거야? 그러길 바라.




너랑 나랑 기타 동아리에서 노래 부르던 기억이 나네. 네가 골라온 곡을 나는 영문도 모르고 연습도 참 많이 했었어. 작은 콘서트 할 땐 정작 네가 화음을 놓쳤었잖아. 괜찮다고 내가 네 등을 도닥도닥해준 것도 기억나지?


앨버트 해먼드가 부른 For the peace of all mankind, 지금도 가끔 흥얼거리곤 해. 그럴 때마다 네 생각이 나네. 오늘 그림 수업에서는 9월의 꽃들을 몇 가지 그렸는데, 다 그리고 나니 문득 네가 떠올라 소식 전한다.


코스모스(Cosmos)는 꽃말이 소녀의 순결, 순정, 그런 거라더라. 사실 난 그때 소녀라기보다 소년에 가까운 친구였을 거야. 그런 나한테 네가 뜬금없이 '사랑해'라고 해서 내가 '고마워' 그랬던 기억도 나네. 난 소년이었으니까.


두 번째 그린 꽃은 라벤더(Lavender)인데 빨래할 때 맨 마지막에 세탁기에 넣는 향으로만 기억하고 있다가, 꽃 모양을 보고 하늘하늘 바람에 움직이는 네 모습이 생각났어. 너는 키도 컸잖아. 항상 내 기타를 들어주곤 해서 나는 너를 기타 행거로 생각했었던 건 아닌지 조금 미안하기도 해.


참, 라벤더는 침묵, 나에게 대답하세요라는 꽃말이래. 네가 거의 말이 없는 것도 나는 좋았고, 노래할 때 웃으며 눈 맞출 때 무척 즐겁고 행복했어. 네가 침묵한다거나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 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맞지?


석산(Lycoris)이라는 꽃은 이름처럼 꽃말이 회색 같아. 체념, 슬픈 추억, 죽음, 환생, 잃어버린 기억, 뭐 그렇단다. 네가 결혼한 지 1년 만에 나랑 우연히 만났을 때 집에서 살림한다면서 나한테 감자 잘 삶는 법, 이불 잘 빨아서 바싹 말리는 법 알려준 거 기억해. 네가 이쁘게 행복하게 잘 사는 거 같아서 기뻤어.


그런데 10년쯤 후 다시 만났을 때 재혼했다고 해서 놀랐어. 음, 이혼하고 재혼하고, 삶이 그런 거지 뭐, 그랬어. 너와 그녀의 아이들이랑 모두 가족이 6명이 되었다면서 네가 기뻐하던 모습도 생각났지만 얼마 후 너의 아이들과 그녀가 미국으로 떠났다고 해서 나는 이상하게 안절부절 불안하더라.


네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네 옆에는 그녀의 아이들을 두고 재혼한 아내를 같이 보내며 다시 외로워졌겠구나 생각하니 내 마음이 까매졌어. 그건 아니지 않아?


사업을 하며 여기저기 따로 사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고 네가 그랬었지? 나랑 술 한잔 하며 인생이 별거 있냐며, 너는 괜찮다고 아이들과 아내가 원하면 조금 힘든 게 뭐 대수냐며 그랬었잖아.


난 그때가 너랑 만나는 마지막이 될 줄 몰랐어. 반가운 웃음으로 언제나 다정했던 네 모습이라 생각했었는데 간암이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많이 울었어. 너무 갑자기 나빠져서 모습을 알아볼 수도 없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막 소리 내서 울었어.


가여운 내 친구. 다른 사람만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정작 뜨거운 위안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을 거 같아서 마음이 많이 아팠어.


구절초(Korean Chrysanthemum)라는 저 하얀 야생 국화를 보면 네 생각에 내 마음도 하얗게 흔들린다. 하얗게 마음이 바래진다. 구절초의 꽃말은 순수라더라. 너처럼 순수하게 그저 열심히 성실히 묵묵히 사는 꽃인가 봐. 보고 싶다, 친구.


마지막으로 허겁지겁 그린 건 보라색 장미(rose)인데, 다 그리고 나서도 무슨 장미가 이리도 펄렁하게 널브러진 거 같던지. 그래서 그런지 보라색 장미의 꽃말은 불완전한 사랑, 영원한 사랑 이래. 너의 옆에서 웃으며 눈 맞추고 안아주고 얘기할 사람이 얼마나 있었던 거니? 나도 나 사는데 급급해서 자주 못 본거 아쉽고 속상하네.


나는 이곳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있어. 언젠가는 네 얘기를 남기고 싶었어. 앨범을 뒤지니 네가 내 기타를 들고 둘이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달랑 있더라. 네 생각하면서 오래 간직할게. 네게 해줄 수 있는 건 겨우 너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글을 쓰는 거네.


너도 이제는 힘들지 않은 곳에서 편하게 보내기 바라. 네가 생각날 때 이 꽃들을 읽으며 너를 기억할게.


안녕.



그림 - 9월의 꽃들, 오일파스텔 by 희수공원 230921

마음에 남은 눈을 치우는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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