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쌓이고 쌓이다 방향을 잃고 헤매다 다시 쌓인다. 그중 어떤 하나를 선택하면 그 길 따라 낯선 우연이 다시 시작되는 거다. 좋은 나쁜 좋은 나쁜 좋군으로 마무리하는 건 아무래도 류스케의 규정인가 보다. 지루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노조미'로 끝나지만 거기서 시작인 게 우연이고 거기서 위안받고 싶은 게 사람이고 그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상처라는 거다. 꼭 뒤집어 해갈해야 하나. 머무는 대로 시간이 온다. 찾아다니며 푸는 사람들. 시시하다.
내가 동식물 분류표를 모두 외워 답안 작성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교수는 나를 기억해내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기말페이퍼를 제출하지 않았는데도 그럴 리 없다고 A+을 주지는 않았을 거다. 술수가 아닌 개인적 좌절과 포기였는데 A+을 받아 들고 얼마나 당황했던가. 교수 평가 시스템 뒤집으러 찾아갔다가 그냥 넘어가달란 애원을 마주한 후...
내 삶의 철학을 고수하고자 성적 변경 신청서를 내자 조교가 학교 본부로 불려 갔다. 조교는 자신이 한 채점이 아니므로 교수의 이름을 알려줘야 했다. 교수는 뒤에 앉아 어떻게든 조교를 통해 무마시키려고 했으나 나는 꿈쩍하지 않았다.
교수는 경위서를 쓰고, 윤리 위원회에 회부되어 그 깟 자기가 했어야 할 학생 평가 따위에 신중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자아 비판하듯 변명과 사과를 토해야 했다. 위원회 결과는 삽시간에 학교에 수군거림으로 퍼지고 교수는 상처 난 자존심을 회복할 길 없어 한 학기 병가를 냈다.
쪼끄만 여학생 하나랑 다시 마주하기 싫어 병가를 낸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그동안신경 쓰지 못했던 엉덩이 종기가 갑자기 스트레스로 활활 늘어나 수술을 하게 되었다며 동료들의 이상한 눈길을 피해 학교를 돌아 나왔다. 수술은 무슨!
손이 닿지도 않는 엉덩이 끝자락을 아내에게 내밀며 여행이라도 다녀와야 속이 풀릴 것 같다고 한탄하며 승낙을 받아냈다. 엉덩이 종기 짠 자리가 쓰라려 넓은 좌석에 앉아야 하니 비즈니스 좌석을 예약해 달라 아내에게 쉬렉 고양이 눈으로 애원해서 얻은 큰 자리가 편안한데 옆 좌석의 묘령의 아낙네가 흐느끼며 울고 있다.
어색하게 손수건을 건네주다 눈이 마주쳤는데... 이 뜨거움은 뭔가! 한국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겁나 강한 예감이 들면서 아낙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엄지 손가락으로 천천히 다독여 내렸다. 아...
나는 교수의 애원에 갑자기 무책임의 찌질함과 함께 생계의 처절함을 느꼈다. A+ 학점을 땅에 그냥 묻기로 하고 교수실을 돌아서 나오는데 왠지 A+을 받은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내 결벽증의 상처로 남아 한동안 우울했다.
그 후 나는, 다시는 그 따위 종류의 A+을 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다. 하고 싶은 공부는 쭈욱 A+로, 하기 싫은 과목은 일관성 있게 바닥에 안정적으로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