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수공원 May 05. 2024

에릭 로메르

[영화] 사계절 이야기 - 봄, 겨울, 여름, 가을

[no 스포일러는 없다]


겨울, 봄, 가을, 여름, 나와 로메르 씨의 계절은 다르다.


장 좋아하는 계절, 겨울로 시작해 피하고 싶은 보라색 봄을 겪고 한 순간의 뜨거운 죽음을 선사할지도 모를 여름으로 깊이 들어갔다가 내 손을 잡아준 사람을 따라 가을에서 왈츠를 춘다. 너무 해피엔딩이다. 수많은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불안한 해피엔딩, 춤추는 스텝마다 채이는 오해들이 끝내 발밑에서 춤추고 있기를.


로메르 씨는 봄부터 시작한다. 오랜 고착, 낡은 습관 같은 시작, 묘하게 일치하는 숫자가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매력적인 영화감독이자 작가, 교사였다. 사계절 이야기에서는 자신을 중심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거나 세 사람 중 하나로서 목적과는 다른 유혹의 말로 소유하려 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의 내밀한 심리를 마음 깊이 박히는 세세한 표현으로 끄집어낸다.


에릭 로메르는 시종일관 대화하는 사람들의 말로써 틈을 만들어 갈등으로 채웠다가 스스로 자신과 화해하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한다. '삼, 셋, 3'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아슬한 부정, 긍정의 사유가 풍성하다.


사람들의 말이 모든 실마리가 되고 증거가 되고 상상을 하게 하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만만하게 따라갈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을 준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두 감독 모두, 행동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언어적 묘사의 힘으로 모든 상황을 끝까지 상상으로 이끌어 전율케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새로운 물결이란 의미의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영화감독이다.


사계절 이야기 Contes Des Quatre Saisons by 에릭 로메르 Eric Rohmer


몽상하는 이 있었네 Conte De Printemps (1990, 107분)


편안한 상상의 무질서함이 그립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안전하고 자유로운 그런 세상을 향한 외침 같은 시간들이다. 사회적으로 묶이지 않았으면서도 자신과 상대를 옭아매는 방식의 답답함, 독립적으로 혼자의 자유를 누리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말과 말 사이를 촘촘하게 이어주는 행복한 몽상의 시간이다. 답이 없는 관계라도 서로 원하길. 당신에게 그래도 될까요? 세 개의 '네'가 주는 깨달음은 어디로 닿을 것인가.


다음다음 해 겨울이 오고 Conte D'Hive (1992, 114분)


'당신을 사랑하지만 더 사랑하고 싶어, 약간만 더.' 그들이 들떠 걸어 다녔던 거리를 꿈에서 다시 내가 걸어 다닌다.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마음속에 남은 사람이란 무게를 꿈으로 남기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잠이라는 죽음을 깨고 그 아침 다시 생명으로 와서 '예술이라면 떳떳하게 행하라'는 셰익스피어와 '존재하기 전 어딘가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플라톤을 지나며 뜻밖의 경이로움을 맞는다. 오오오 세상에!


꽤 오랜 후 여름이 가벼워지는 듯했지만 Conte d'été (1996, 114분)


미친 듯이 사랑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만 하는 게 습관이 된 지금을 어떻게 할까. 그렇게 사는 게 철학적이란 말은 가슴을 허망하게 했다. 어떤 사람과 있을 때 진짜 자기 자신을 느낄 수 있다면 주변을 둘러싼 갈등을 쉽게 풀 수 있을까. 질문을 가득 던져준 흔들림의 시간들이 사랑인 듯 아닌 듯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이내 사라진다. 결국 어떻게든 풀리기 마련인 일들, 자기 자신의 꿈으로 가는 길이다.  


두 해가 가고 가을에 하나가 되는 사람들을 보았네 Conte d'automne (1998, 112분)


웃음과 움직임과 서로 마주치는 소리로 가득하다. 욕망이 없으니 신뢰한다는 말, 견디기 더 어렵게 하는 순수한 우정이라는 말, 세상으로 나온 이런 말들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본질적으로 사람을 나약하게 몰아가는지 서러웠다. 현실과 꿈으로 뒤섞인 인생에서 애매하기 짝이 없는 순간들에 매달려 판타지를 붙잡으려는 사람, 그런 당신 앞에 눈물이 나서 한마디 말조차 허영이 되는 사람이 있음을 알고는 있는지. 주인공의 해피엔딩에 골이나서 둘러싼 사람들의 상처에 골몰하는 나만의 가을기록이다. 가을 이야기 주제곡으로 기원한다.


삶이 여행이라면
날씨가 화창하길 바란다.
야생꽃은 푸르르길
모두 평안한 여행하길.


매거진의 이전글 비에 젖은 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