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 같은 도시를 걷는다
첫 발을 내디뎠던 거리는 차가웠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내가 한 모든 나쁜 짓이 들통나서 벌을 받는 것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딱히 생각나지도 않는 나쁜 짓들이 내 걸음마다 아른거렸다. 불투명한 채로.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을 피로한 얼굴 근육을 끌어올리며 근근이 끝냈다. 조금 게을러도 되는 것은 잠시 내려놓았다. 오전의 한기가 온몸으로 퍼져와 해가 비치는 양지로 나를 자꾸 밀어냈다. 선글라스가 마치 헬멧처럼 얼굴을 압박했지만 따끈한 봄하늘이 이내 그 묵직함을 들어냈다. 광합성이 필요했나 보다 한다.
방향도 가늠하지 않고 경사길을 내려가며 어디로 가기로 했는지 더듬더듬 주춤주춤 한다. 이런 기분인 날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나는 다른 나를 입고 한껏 그런 척한다. 아니 정말 그렇다. 나 자신도 무척 신기한 다른 버전의 나를 오늘은 다독거리기로 했다. 그래, 어떻게 매일 씩씩하기만 할 수 있겠어.
계속 걷는다.
땅에 닿는 발바닥을 느끼고 구부러지는 무릎에 안도한다. 하늘거리는 남색 재킷이 걸음마다 나를 위로하고 물방울무늬의 주황색 스커트가 괜찮다고 올려다본다. 그럼 그럼 괜찮지.
오랜만에 걷는 거리, 이전에 있었던 낯익은 간판들을 볼 수 없었다. 반가움에 먼저 웃고 돌아 들어간 모퉁이에는 임대한다는 A4 메모만 덜렁 붙어 있었다. 서늘한 가슴을 채우는 공기가 씁쓸하다. 그렇게 사라져 간다.
타이레스토랑도 일본식 도시락집도 매운 짬뽕집도 샐러드 신선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도 다 어디로 간 건가. 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혼자 걸으며 위안한다. 더 좋은 곳으로.
오늘 걷던 거리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내 눈에 덮인 기분만큼만 나를 대하는 차가운 거리, 그렇게 세상은 공평한가 보다. 누구도 호객을 하지 않았다. 혼자 알아서 돌아가는 키오스크, 식당의 키오스크, 영화관의 키오스크, 누군가 눌러주기만 기다리는 나도 키오스크다.
계속 걷다가 한기에 허기까지 겹치니 아이러니하게도 살 맛이 난다. 겨우 한 나절의 우울이었던 거야. 걷다가 그 우울의 끝까지 온 거야.
걷는다는 건 스스로 다독이며 치유하는 거구나.
세상의 색깔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명랑 쾌활한 간판들이 흔들거리고 있다.
주홍으로 새콤하게 자몽을 갈아 넣은 주스와 뚱땡이 새우가 정신없이 들어있는 샐러드를 먹었다. 엄청 배고파서 우울했던 사람처럼 싱글거리며 접시 바닥의 오리엔탈 소스까지 다 먹었다. 쩝쩝쩝!
내려온 길을 다시 걸어 올라간다.
한껏 풀 죽었던 나를 건져 올린다.
오늘도 결국 잘 보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