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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May 03. 2024

예술하는 그녀의 골목

셀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굳이 그래요

그녀가 문을 열어두겠다는 전갈을 보내올 때부터 정상으로 뛰는 심장을 바라는 건 무리입니다. 벌써 저는 그녀에게 향해 있어요. 달음박질로 가기도 하고 천천히 발을 내딛는 걸 눈을 내려 확인하기도 해요. 그녀가 저를 초대했어요.


앗, 잠깐 헷갈리네요. 날짜 시간은 제가 정했는데 왜 저는 초대받은 느낌인 거죠?


그녀의 골목을 헤매고 있어요.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보다 그 문을 향해 다가가는 시간에 전율하며 문이 영원히 나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해요. 내리막길에서도 뛰지 않기로 합니다. 너무 빨리 닿으면 너무 빨리 사라져 버릴 것 같아요.


그녀에게 고백해요. 저의 기쁨도 고백하고 저의 아픔도 고백하지요. 그녀의 갈증에 귀 기울이고 그녀를 사랑하는 강아지의 외로움에도 귀 기울여요. 온종일 기다리던 강아지가 팔을 끌어당기면 못 이기는 척 따라가 꼭 안아주시겠죠.


그녀의 색깔은 예술이에요. 한 겹도 한 순간도 같지 않아서 다른 마음이 치유받고 오면 또 다른 마음이 욕심을 내며 그녀 앞에 앉아요. 그러면 그녀는 색깔의 마술을 부려 빛을 쏟아 줍니다. 오늘은 총총한 별이 쏟아지듯 펄이 가득해요.


편식이 삶인 저는 그녀에게 말해요. 보리밥이요. 사실 저는 밥이 되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보리밥 한 알갱이를 관찰하는 걸 좋아해요. 더러운 행주 색깔을 하고도 한껏 요염하게 부풀어있는 보리밥 알갱이의 초라한 자부심을 느껴요.


도토리 묵에 청국장까지 나오는 곳이면 식사를 다 하고도 드러누워 떠나고 싶지 않아요. 누워도 꺼지지 않는 붕싯 솟은 배에 손을 가만히 얹고 바삐 돌아다니는 보리밥 알갱이들과 냄새 따윈 안 나는 척 청국장의 화해를 상상하고 싶어요.


앗, 더 이상은 안된다는 찰나를 지나 샷추가 진한 커피와 생크림 듬뿍 든 카스텔라 앞에서 경건합니다.


슬픈 끝을 씩씩하게 얘기해요. 흔들리는 그녀 눈빛에서 깊은 동정을 길어오고 진하게 아픈 공감을 읽습니다. 그렇지만 정해진 길은 어찌할 수 없어요. 그냥 묵묵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겁니다. 예술의 골목에서 그녀의 색깔에 닿아요.


사는 게 예술이라 다행입니다. 그녀의 골목을 헤맬 수 있어 기쁩니다. 필사의 명상, 고전의 가치, 사람을 다독이는 힘을 배웠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문을 다 열어젖히진 못했어요. 닿는 길에서 헤매며 어디쯤 문이 있을지 가늠하며 살아요.


끝은 언제나 있으니 안심하고 지내요. 거기에 닿는 길에 마주치는 시간들, 그렇게 모두 쏟으며 진심으로 살면 돼요. 사람을 만나는 건 세상을 하나 더 얻는 것. 얼마나 많은 낯선 세상이 있을지 모르지만 손을 내밀면 잡아주기로 합니다.


그녀의 골목은 셀 수 없어요. 


그냥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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