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퍼온 이야기
상상만 하던 일들이 한 번에, 그것도 하루에 모두 이루어지는 판타지 같은 날이었다. 비 오는 새벽 산행을 꼭 하고 싶었다. 오늘 비가 온대서 기어코 오늘 숲으로 갔다.
어쩐지 새벽 4시의 하늘이 연보라색이다. 신비가 온다. D로 놓은 기어보다 더 먼저 가는 마음을 잡는다. 어둠을 스르르 뚫고 숲을 향한다. 빗소리가 굵다.
숲에 첫 발을 디디며 낯선 어둠에 움찔움찔한다. 빛을 들었다가 이내 껐다. 비 오는 소리가 황홀하다. 얼마나 이 어둠과 소리를 갈망했던가. 온전한 자연의 소리로 가득한 이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하늘에서 오고 있는 여명의 기운은 내리는 비에 무채색으로 젖어 숲에서 가장 키 큰 나무 끝부터 왔다. 여전히 빛을 허락하지 않는 숲의 어둠에 섰다.
새벽 5시 23분, 일출의 기운은 숲의 밑동까지 내려왔지만 조용한 나무들은 비를 반기고 있을 뿐이었다. 나도 얼굴을 들어 비를 받으며 혹여 어딘가 떨어질 한 줄기 태양을 분주히 찾았다. 비는 빛을 이긴다.
비와 숲은 서로를 빛낸다. 태양이 없어도 서로를 아낄 줄 안다. 연두를 더 연두하게 하고 초록을 다독여 더 강건하게 만든다. 손을 뻗어 비를 받으며 나도 초록이 되고 싶었다.
비의 몸이 무거워 내려앉는 굵은 알갱이가 나무를 흔들 만큼 힘차다. 초록의 색을 파스텔로 훔쳐갔다가 금세 다른 나무로 달아난다. 안개를 겪고 나면 더 흠씬 물이 올라 행복해질 거다. 나무도 숲도.
숲이 엉성해진 사이로 빛이 내려오려 자꾸 보챘다. 나는 저 태양을 외면하러 왔으니 보고도 못 본 척 뜨거움을 털어낸다. 태양이 천천히 구름 저 편으로 사라지고 내 뜨거운 몸뚱이가 이내 서늘해져 안심했다.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숲에는 손님이 많다. 비도 손님, 안개도 손님, 구름도 손님, 태양도 손님, 그리고 나도 손님이다. 오늘은 운해의 친절한 마사지로 숲이 상을 받는 날인가 보다. 좋겠다.
숲이 밀어낸 저 구름 아래에는 사람들의 마을이 있다. 슬픈 사람, 외로운 사람, 어여쁜 사람, 강건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숲은 초록 기운을 구름을 통해 보내는가보다. 잘들 사시오.
내가 간 숲에는 바위도 많고 꽃도 많고 나무도 많고 계단도 많았다. 그 계단을 밟고 밟아 오를 수 있는 끝까지 걸어갔다가 왔다. 오늘 나는 여덟 시간 동안 삼만 오천 삼백 서른여섯 걸음을 걸었다.
나를 살리는 숲, 내 눈을 밝게 하는 숲에 다녀오면 넉히 한 두 달은 잘 보내곤 한다. 올 때마다 다른 길이의 숲, 볼 때마다 다른 높이의 숲, 팔을 뻗을 때마다 다른 뜨거움으로 내게 안기는 숲은 나의 생명이다.
오늘 어둠을 가득 안은 숲에 첫 발을 디디며 들었던 이 멋진 빗소리를 오래 기억할 거다. 이런 날 올거라 했잖아. 눈물나도록 기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