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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Jul 21. 2024

오! 라르게토!

꿈꾸는 낭송 공작소 북토크, July 2024

Oh! Larghetto!


그리움이 과거로 떠나고 있다.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뒷걸음으로 느리게, 하지만 우아하게, 아름다운 흔적을 남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흔적이 마저 휘발되기 전 글로 남기는 것이다. 그 순간을 온전히 남길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기를 쓰고 조금 더 이른 새벽을 맞는다.


느리지만 우아하게 연주하라는 '라르게토(Larghetto)'는 '라르고(Largo)' 보다는 조금 빠르고 '안단테(Andante)' 보다는 조금 느리다.


쇼팽의 녹턴, Op. 9, No. 1이 '라르게토(Larghetto)'다. 첫음절이 시작되면 그게 어디서든 가만히 끝까지 듣는다. 이러다 죽겠다 할 만큼 힘겨운 시간이 있었다. 이 '라르게토'는 진통제가 되었다.



느리고 잔잔하게 내 고통이 피아노 소리에 휘말려 희석되는 순간을 잊지 못한다. 뜨겁게 들끓던 순간들을 천천히 바라보며 통증이 잦아들었다. 시간을 펼쳐 넓은 간격을 느리게 걸으며 비로소 가능한 순간들이었다. 나의 느림은 패배가 아니었으며 지금까지 나를 잇는 힘이 되었다.





꿈꾸는 낭송 공작소에 다녀왔다. 2024년 매달 셋째 주 토요일에 나의 디폴트 예약 알림이 온다. 7월의 북토크에서는 부산의 시간과 향기를 담은 예쁘고 멋진 엄마와 딸과 아들을 만났으며 숲의 공기와 초록을 듬뿍 담은 바람을 맞았다. 다시 만나 기쁜 분들로 더 신났고 미국에서 온 특별 손님의 미소로 더 풍성했다.


차분하게 경청하는 아이들의 순수와 시간을 진하게 남기고 싶은 독자로서의 엄마를 보았다. 아이들이 처음 만났을 그 북토크 속 엄마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신비하고 진지했을 거다. 존경하며 더 사랑하게 될 거다.


엄마는 그 존재 하나만으로 아이들에게 온 세상을 전한다. 사유 깊은 보르헤스의 꿈의 연결에 아, 역시 감탄하게 된다. 소년이 선잠에서 꾼 꿈이 주는 사이의 미학이 이어지는 지점에서 나는 화들짝 깨어났다.


우연한 인연이 관계를 잇는다. 내가 하고 싶었던 엄마의 모습을 만났다. 나를 반성하게 하는 시간이 귀했다. 호기심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큰 행운이다. 그것도 책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서로 나눈다는 건 필연인 거다.


숲해설가를 계속 따라간다. 계속 따라가고 싶었다. 원하는 숲, 사람들의 관계를 비추는 이야기와 만나는 숲을 선물하는 일은 얼마나 신날까.


나의 영어교실에서 6학년 아이와 같이 읽었던 꿈꾸는 낭송 공작소와 아이가 뽑은 명문장들을 나누며 나는 시작부터 떨고 있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순간을 근근이 참고 있었다.


느림과 연결하여 이숲오 작가가 쓴 실패마니아 수업 후기를 읽다가 결국 정신줄이 끊어졌다. 툭! 벅차서 흥분하고 떨다가 그랬다. 부끄럽다. 이젠 과거로.


몸의 힘으로 써 내려간 편지의 행간을 바라보며 다시 읽으며 깨닫게 되는 일, 그런 느린 시간

영화 속 주인공들의 빠르고 가파른 대화에서 실패하러 탈주할 거라는 그 실패의 사이, 그 가치

익숙함과 안락함에서 뛰어올라 하게되는 낯선 고민과 절망의 실패라도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

나와 너 사이의 그 숲(爾숲吾)에는 멀리서는 보지 못하는 수많은 길들이 존재한다는 깨달음


나의 모든 고민과 통증과 실패는 후다닥 왔지만 느리게 걷는 동안 제 자리로 돌아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느릿느릿 조용하고 우아한 쇼팽의 녹턴 라르게토 사이로 고통을 흘려보내며 견뎌냈듯이, 앞으로 어떤 무자비한 모습으로 오게 될지 상상할 수 없는 실패도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며 엄마를 만나며 숲을 걸으며 단단한 근육을 만들어 두면 두렵지 않을 거라 믿는다.


두 시간의 북토크 후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爾SOOP吾

eSOOPo

SOOP

숲길

나무길

숲사이길

우아한산책


북토크의 내 모래시계는 여전히 솔솔 내려가며 바람이 인다. 여운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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