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내 아랫입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끼자마자 소파 뒤로 물러나 기대며힘을 주었다. 왠지 그가 오른손을 쑥 내 얼굴로 뻗을 것만 같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간이었고 만남이었다.
봄마다 스멀거리다 여름이면 가려움에 나를 미치게 하는 얇은 내 목살의 아랫부분을 상담하러 피부과에 가던 중이었다.
스콜 같은 비에 도로 어디선가 사고가 났는지 끌고 나갔던 차는 백 미터도 채 못가 삼십 분이나 빗속에서 축축함을 더하고 있었다. 누군가 내 차를 빗물에 말아먹고 있는 것처럼 후루룩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요즘엔 비만 오면 땅 위로 물이 금세 쌓인다. 차를 돌렸다. 와글 빠글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용기를 냈다.
약속 시간에 일찍 나오는 습관은 다행이었다. 버스에 전철을 갈아타면 빠듯하거나 아주 조금 늦을지도 몰랐다. 늦는 건 어디에서든 용서가 안되었지만 폭우에 마음까지 젖어 질척거리니 그냥 비굴하게 죄송하다 사정을 하기로 했다. 마음이 편해졌다.
지하철을 타려는 내가 낯설었다. 그간 변태를 수없이 마주한 곳도 지하철이었고, 같은 방향으로 휘몰아 흔들거리는 사람들에 공포를 느낀 것도 지하철이었다. 어두운 지하를 주로 달린다는 것도 나를 못 견디게 만드는 울렁증 중 하나였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때 전화가 왔다. 그다.
정신은 예술인, 생긴 건 멀끔한 철수 정도랄까. 오래전 죽은 패션 디자이너가 버터 물고 부르는 '촤~알쓰'라고 불려도 어울릴 만큼 살짝 이국적인 면이 있었다.
얼기설기 살다가 실수로 잘못 디딘 징검다리에서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머무는 시간 같은 그와의 만남들이 건조하면서도 애착스럽다. 병적이다.
"카페에 왔어요. 여기 강변역이에요."
내 뚫린 귀가 멍해졌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지 머리까지 진공 상태가 되는 것 같았다. 피부과가 그 근처였다. 어쩌다 보니 거기까지 갔더라는 거였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기차역에서 몽롱하게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그 근처에서 약속이 있어요."
"건너오세요."
건너오라고? 예의 바르게 뜬금없는 이걸 나는 매력이라고 혼자 우긴다. 꿈꾸는 듯 표정을 한 내가 친구에게 그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친구의 단칼은 나를 더 그에게 집착하게 했다.
'야, 집어치워라! 그런 사람 만나면 다 타 죽는다. 넌 감촉하는 사람인데 그는 휘발성이네.'
그래서 지금 이 찰나가 중요한 거 아닌가. 홀연히 사라지기 전에 실컷 눈을 뜨고 심장을 열고 만져보는 거지. 바람에 날려 손가락 사이로 빠져 흩어지는 모래알이 될 거란 걸 아니까 지금이 중요한 거다.
톡도 없고 문자도 없다. 사진 한 장 달랑 날아왔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그 광경을 나란히 볼 것이다.
피부과에 10분 늦었다. 늦는 고객이 일상인지 늦음에 대한 벌은 없었다. 짜증이나 공치사를 해대면 가장 품위 있게 웃으며 사과를 할 생각이었지만 오히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허탈했다.
자외선 차단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병원은 지루하다. 내 삶에 제로다. 요즘 의사가 하는 처치나 처방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생 자외선 차단 했잖아! 그래도 가려워서 괴로워서 온 거잖아! 그래, 가려우니 괴로우니 가리고 다닐게.
그가 보낸 사진을 확인했다. 현실은 사진이 아니었다. 정지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 거슬리는 소음과 너울거리는 해를 비추는 유리창에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 지금이 아닌데...
내가 예상했던 헤맴보다 짧은 시간에 당황하면서 일단 입으로만 만드는 형식적인 미소를 어색하게 보냈다. 왜 항상 떨고 있는 거지? 그 앞에선.
포케를 먹었다. 야채를 듬뿍 넣고 아보카도가 풍성하게 든 점심 사발을 들고 행복해하는 나를 그는 싱글싱글 바라보았다.
그의 샐러드드레싱이 왜 연두색이 아니라 베이지색인지 궁금했지만 깍둑 썬 오이를 찍어 먹는 그를 보며 베이지가 맞는다고 생각했다. 까탈스러운 그가 주문과 달리 나온 드레싱을 참을 리 없었다.
사실 '까탈'이라면 내가 대표적 인간이지만 그의 앞에서는 내 날카로운 손톱을 아래로 숨기고 그의 까탈의 경지와 깊이를 가늠하며 때론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 귀엽기까지 한 그다.
한 시간도 넘게 잠자코 책을 읽던 그가 내 입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안 건, 눈을 감고 듣고 있던 조쉬 그로반이 끝났을 때였다. 눈을 뜨자 마자 마주 보는 어색함에 이상한 열기가 올라왔다.
"거기 점이에요?"
직감은 틀리지 않는다. 번개 치는 머릿속을 나와 손으로 아랫입술 아래를 더듬거리다 걸린 건 포케 먹을 때 튀어 올라 붙어 있던 참깨알 만한 김 조각이었다.
"김이에요. 하하하!"
점 이래도 좋다. 김 이래도 좋다. 헤벌쭉 흘린 웃음으로 같이 마주 보는 이 순간이 좋다.
어디에 있을 건지 당최 모르는 사람들이 어느 날 만나 같이 시간을 보내고 스르르 헤어지는 이 우연을 언제까지 살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날이, 제대로 예술하는 그다운 그로, 사랑하기를 즐기는 나다운 나로 사는 길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