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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Sep 19. 2024

결별 1

[초단편소설] 2-1 이미 늦은 남자

그녀가 나에게 한 결별 선언은 새파랗게 높은 하늘에서 내 머리를 향해 날카롭게 떨어지는 칼날이었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이제 그만 마주치고 싶어'라고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내가 뭘 어쨌길래?


이만큼 큰 다국적 기업에서 홍보실장으로 있을 수 있다는 건 누가 보더라도 성공한 것이었다. 가장 먼저 팀장이 되고 최연소 실장으로 부러움을 받으며 모든 게 나를 위해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었다.

 

게다가 나는 경제 경영 관련 책도 세 권이나 내고 이제는 편안한 삶을 위해 위안을 주는 에세이를 쓰고 싶어 들어간 글쓰기 모임에서도 일종의 비밀스러운 대시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모른 척 관심을 끌게 하는 건 나만 아는 나의 신병기라고나 할까.


우연히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표정이 거의 없는 그녀에게 왜 끌렸는지 사실은 지금도 모르겠다. 서른 후반쯤 되면 세상을 모두 씹어먹고 있다는 거만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 또한 그래 보였다.


세상을 시시해하며 고결한 걸음으로 들어간 와인 동호회에서 회원들을 향한 호탕한 나의 웃음마저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런데 한 사람만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녀였다.


한 달에 두 번 만나 새로운 와인을 맛보고 그 맛의 깊이를 품평하며 어울리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은 생각보다 삶에 대한 충만을 한껏 즐기게 했다. 그녀의 눈길이 한 번도 나에게 온 적이 없다는 사실만 빼고.


와인에 취하기 시작할 때쯤이면 어느새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게 더 나를 안달 나게 했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나갔다.


겨울은 그녀를 와인바에 더 머물게 했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소리가 커진 그녀를 보며 아마도 겨울이 그녀를 점화시키는 열쇠를 가지고 있나 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제 경영 관련 책을 쓰셨으면 세상의 모든 부를 모으는 방법을 아시겠군요?”


그녀의 또랑한 목소리가 처음으로  귀를 울렸을 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책과 부는 상관이 없다. 게다가 경제 경영과 관련한 내용은 이미 책에 기록되는 순간 낡고 낡은 지식의 먼지로 풀풀 흩어진다.


책의 저자라는 풍선 같은 부푼 이미지가 세상에서 조금 더 미지근한 온기로 떠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갑자기 내 부푼 풍선 앞에 불에 달군 뾰족한 바늘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내 앞에 어른거리며 나를 사랑한다고 모자란다고 투덜거렸다. 맞다, 사랑한다고 투덜투덜, 항상 그랬다. 내게 뭔가 바란다고 한 적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매번 연락할 때마다 나를 분석하고 꼬리표를 달아 ‘그래도 너는 좋은 사람이야. ’라며 톡을 보내왔다.


‘그래도’라니!


그녀의 ‘그래도’가 수십 번쯤 되었을 때 무작정 결별을 통보받았다, 전화로.


‘어느 키치예술가의 뜨겁게 부푼 인형들처럼 너는 그렇게 사는 게 좋겠어. 하지만 너의 몸뚱이 중에 온기가 느껴지는 곳은 하나도 없어. 누워만 있는 거, 그건 아니지. 그래도 너는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더 그녀의 ‘좋은 사람’이 되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허그나 키스가 문제였을까. 아니면 섹스?


혹시 그 한 마디가 그 쿨한 그녀를 돌아서게 한 걸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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