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존재를 깊이 묻고 나는 연무(煙霧)라는 의미의 헤이즈(haze)로 활동하는 온라인 글쓰기 공간에서 현실에서는 메꿀 수 없는 공허함을 채우며 살고 있었다.
글을 쓴다는 건 찌든 삶의 찌꺼기로 떨어져 나가는 각질마저도 윤기 나게 되돌릴 수도 있는 환각 같은 거였다. 마약 같은. 거의 모두들 그랬다.
실명만이 실제인 가입신청을 읽으며 당신은 슬퍼서 왔구나, 외로워서 왔구나, 자랑하러 왔구나 대강 대강 파악하며 클릭질로 승인을 해주면 그만이었다. 잘 들 살아내시라!
이름을 사랑한다. 이름은 세상에 자신을 꽂아 두는 압정 같은 것이다. 그 실명으로 온과 오프를 연결해 두는 것이다.
아이디 Zumeta, 이름 이. 주. 빈. 뭐야, 세상을 지휘하겠다는 건가. 지휘자 주빈 메타를 대강 따라한 스펠링에 명랑하게 승인 클릭을 했다. 글 쓰며 당신 인생의 주빈이 되기를.
온라인의 비밀은 그 실명을 덮어두는 아이디, 또 다른 정체성으로 자신을 살아보려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 위를 걷고자 하는 것이다.
혼탁한 안개 같은 내면을 글로 쓰며 가라앉히는 온라인의 침잠과는 달리, 오프라인의 현실 도피는 실제보다 거대하게 부풀어 즐기는 알코올이었다.
꽤 젠체하고 위선 가득한 인간들의 와인 동호회는 가만히 앉아 듣기만 해도 다른 세상이었다. 매번 새로운 와인, 그 색깔에 빠지고자 가는 나의 유일한 오프 모임이었다.
혼자 홀짝거리다 사라져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곳, 결국 부와 학력과 나이를 맞춰 흥분하고 마는 속물들의 세상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영화 보듯 즐기고 있었다.
“이주빈입니다!’
번개 맞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온오프의 교차점에서 뜨거운 박치기를 한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그때부터 그의 목소리와 웃음이 다른 모든 소음을 뚫고 내게 들어왔다.
책 몇 권 쓰고 경제 경영의 달인처럼 가벼웠다가 취기가 오르면 에세이로 넘어갔다. 비어 가는 가슴이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릴 땐 어깨라도 다독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를 향한 몇 개월간 귀만 열어 두었다. 내가 좋아하는 겨울이 오면 눈을 맞춰볼까.
“경제 경영 관련 책을 쓰셨으면 세상의 모든 부를 모으는 방법을 아시겠군요?”
첫 말 걸기 질문의 식상함에 기분이 처참했지만 관심은 상대로부터 시작하는 거 아닌가. 네가 있는 곳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면 좋겠다는 그런 의지로 이해하길 바랐다.
세상에 대한 효율성과 공리주의적 철학들은 그의 전공과 그가 쓴 책들에도 그대로였다. 내가 등지고 사는 원리에 충실히 부합해 사는 그가 신기했다.
그래도 에세이를 쓴다잖아. 그렇게 다독이며 그를 사랑했다. 말도 눈길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았다. 최소한 나의 정의로 따지자면 그랬다. 에세이라는 장르를 사랑과 감성 덩어리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허그의 다정함도 모르고 키스의 달콤함도 모르는 섹스를 위한 허겁지겁은 경제적 효율성이나 세상을 경영하는 그 만의 거시적 철학 이론을 실천하려는 것 같았다.
사람을 빼놓은 차가운 그의 이론은 허그도 키스도 섹스도 에너지 효율과 비용을 따졌다. 나는 꼭 안아주는 온기에 빠지고 키스로 뜨겁게 흥분하며 황홀한 그 길 끝에 섹스가 기다리고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누운 여자는 편안함으로 누운 남자는 당연함으로 배출을 달성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누운 여자가 편안하다니, 세포들이 뜨겁게 열리며 흐르는, 방어할 수 없을 만큼의 통증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사랑했었다니, 나는 더 이상 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결별! 너는 암스테르담 공창용이야. 거기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너는 좋은 사람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다. 어떤 방면에서는 그도 좋은 사람일 것이다.
와인 동호회 모임을 탈퇴했다. 혼자 마셔도 충분할 것이다.
랩탑을 켰다. 나는 온라인 글쓰기 모임을 이끄는 헤이즈로 더 편해질 것이다. 글을 쓰며 마음을 다독여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카페 채팅창으로 메시지가 왔다.
‘Zumeta입니다. 실례인 줄 알지만… 오늘은 글을 쓸 수가 없어서… 결별 통보를 받았어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