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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Sep 01. 2024

새빨간 기와지붕

낯선 도시에서

사람이 몇 없는데 목소리가 천정을 튕겨 내 귀를 찢었다. 십 대 여자 아이의 비명이 팝콘 웃음으로 끽끽거렸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도착하자마자 헤어숍에 들어가 머리를 자르는 일처럼, 이곳의 영화관에 오는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이 괴기스러웠다.


하지만 계획했던 일을 마치고 마음은 기쁘고 넓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묘하게 다른 느낌들을 휙휙 지나며 감상할 수 있었다.


남의 구역에 슬그머니 들어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탱탱탱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내가 신기한가보다. 흘깃거리는 눈초리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방학이라 그런지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많다. 반가운 일이다.


지금 낯선 이곳을 고자질하는 중이다. 이제 저녁 바람 폭발하듯 뿜는 열기는 없지만 여전히 습하다. 드라이빙하며 에어컨 바람세기를 높이자 얼굴 가까이까지 서늘해졌다.


오토바이 두 대가 경주라도 하듯이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을 했다. 도시의 4차선 도로가 카메라도 없이 관대하다. 나도 오토바이를 타면 저렇게 아무렇게나 달리고 싶을까. 그런 자유 본능은 위험하다. 그래도 한번 타보고 싶다.


사거리에서 빨간불이 되면서 눈에 들어온 건 정말 새빨간 기와지붕의 집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나 빨강이오, 뭐 할 말이라도 있소? 하듯이 그냥 원색의 빨강일 수 있을까. 지금껏 살면서 새빨간 기와지붕이 처음이라 차를 달리면서도 자꾸 고개가 돌아갔다.


간판 중 눈길을 끈 건 '살롱'이라는 단어였다. 찻집인지 복고풍의 다방인지 아니면 옷을 만드는 곳인지 알 길은 없었다. 살롱 뒤에 붙은 2로 시작하는 세 자리 숫자가 무척 궁금했다. 278이었던가?


그 옛날 오스트리아에서 유행하던 문인들의 토크 모임을 이끄는 장소의 이름일까. 달리면서도 궁금한 게 많아서 딴생각하다가 종종 다른 길로 들어선다. 그러면 그 낯선 길을 즐기면 된다.


주인공들의 서로 보호하려는 사랑에 눈물이 나다가도 바로 뒷 좌석에서 분위기 화들짝인 팝콘 와작 거리는 소리에 하마터면 180도로 고개를 돌릴 뻔했다. 이 좋은 날 얼굴 붉힐 것 없다.


행여 영화가 재미없어 짜증인데 뒤에서 팝콘까지 뻐걱거리면 그야말로 '너 잘 만났다' 식의 망나니 짓을 하곤 한다. 작작 드시지. 클라이맥스 음악의 절정에서 팝콘 씹어주는 에티켓도 챙기면 좋겠다.


퉁퉁 부은 눈으로 상영관을 나와 화장실 가는 길에 오드리 햅번이 티켓 검사원처럼 쳐다보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죽어서도 벽에 매달려 열심히 일하는 그녀다.


돌아오는 길은 한적했다. 낯선 도시에서 규정 속도 지켜주고 빨간 신호등에 정지하고 초록일 때 천천히 달려 들어와 오늘을 성공적으로 마감했노라 쏠로 파티를 했다.


여전히 영화의 두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통증스런 어린 사랑이 가슴 메이지만 곧 지나갈 것이다.


낯선 도시에서도 인생은 꽤 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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