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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Sep 28. 2024

정신 빠진 글

없음의 관철

심심한 사이사이에 글을 쓰면 시간이 풍성하게 담긴 글을 쓴다. 내 머리를 쪼개어 고여 있던 생각을 펼쳐 두고 쿡쿡 찔러도 보고 비틀어도 보면서 한 단락이 끝난다. 혼자 웃다가 마무리하면 다시 읽어도 그 감성이다.


일하며 뛰어다니면서 임무 마치듯 글을 쓰면 일의 피곤한 찌꺼기가 덕지덕지 붙어 피곤이 줄줄 흐르고 맥락 없이 끊기다가 쓰레기봉투에 글을 마친다. 누더기 같은 마음이 쓰레기 차에 실리면 가만히 반성하게 된다.


한잔씩 들이붓는 사이 글은 어쩐지 처음엔 낭만이 가득한 듯 옛 시인의 달 밝은 밤처럼 초롱하다 막다른 골목에서 헤롱 한다. 늘어지는 단어 사이에 취기가 가득하고 주사가 발행이니 빵! 클릭하고 히죽히죽 혼자 신난다.


새벽과 아침의 길이는 내 글의 밝기와 깊이를 조절한다. 새벽이 길면 글이 글다움에 가깝고 아침이 길면 분주한 일상이 글에 스민다. 심심하면 새벽이 길고 일에 지치거나 음주가무에 진한 밤은 새벽을 훔쳐간다.


정신없는 글을 쓴 날엔 변명도 정신없다. 없는 글에서 찾는 무수한 결핍된 순간들이 아프다.


매일 글을 쓴다는 게 체한 듯 답답하면 이제 접을까 저제 접을까 잠시 궁리하다가도 심심할 때도 쓰고, 일하다가도 쓰고, 주사부리면서도 쓰고, 새벽에도 쓰고, 아침에도 쓰고, 정신 챙기면서도 쓰고, 정신 빼놓고도 썼는데 왜 안 써야 할까 그런다.


글 멀미가 나면 가만히 읽는다.


어둡고 슬픈 감성들, 아픈 통증의 시간이 준 깊은 삶의 통찰에 대한 기록, 글을 쓰는 철학,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고뇌를 들여다본다.


같이 슬펐다가, 손을 뻗어 통증을 느꼈다가, 나는 다르게 쓰는구나, 나는 작가는 아니구나, 때로 좌절하며 가져가는 글의 한 귀퉁이로 내 삶의 영역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불안한 채움이 더 살아있고 싶게 하고 더 쓰고 싶게 한다.


작가가 아닌 쓰고 싶은 사람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나'라고 부르겠다. 좁은 창틀에 낀 것처럼 답답할 때 언젠가 창문이 열려 여유가 생기겠지 희망한다. 그 여유는 또 무얼지.


은 쓰는데 정도는 없다.


글은 한 사람을 오롯이 던져 만드는 유일한 무늬다.


그 누구도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할 수 없다.


세월이 읽어주면 클래식이고

세상이 읽어주면 명저고

사람들이 읽으면 글

나만 읽으면 일기

나도 안 읽으면

....


쓰고만

싶은

'나'


반성하다가

변명하다가

반항하다가

내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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